유튜브 알고리즘이 대단하다. 유튜브에 한 소녀의 얼굴과 썸네일에 “긴기라기니 사리케나쿠”라는 제목의 영상이 하나 올라왔다. 자세히 보니 MBN에서 <한일가왕전>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일본 출연자인 스미다 아이코(住田愛子)가 예전 일본 노래 “긴기라기니 사리케나쿠 (ギンギラギンにさりげなく)”을 부른 영상이 올라 왔길래 도대체 뭐지 클릭했다. 완전 추억 여행을 떠났다. 잊고 있던 노래가 갑자기 생각났다. 87-88년 즈음에 이 노래를 길거리 리어커에서 사서 들었던 일본 노래였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냥 흥얼거리며 불렀던 노래였고, 그 불법 테이프 제목도 <일본 금지곡 모음집> 이런 제목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긴기라기니” 이런 노래도 있었지? 이 노래는 당시 롤러스케이장 일명 로라장에서 정말 많이 흘러나왔던 노래였다. 그런데 갑자기 이 노래가 유튜브 알고리즘에 뜬 것이다. 순간 옛 추억들이 되살아났고 원곡보다 훨씬 소화를 잘 하는 그 어린 소녀의 모습에 감탄하며 보게 됐다.
금지된 시대의 추억 : 긴기라기니 外
일본 노래를 처음 들었던 건, 예전 80-90년대 길거리 리어커에서 불법 복제 테이프를 구입해서 들었던 것이 처음이었다. 당연히 불법이라는 인식도 없이 길거리에서 유행하던 음악들을 당당하게 판매하니 거리낌 없이 구입했고, 대놓고 <금지곡 모음집>, <일본 금지곡 모음집> 이런 식의 작명 센스가 돋보이는 불법 테이프를 들었다.
그때 들었던 노래 중에 기억나는 곡은 “긴기나기리”,“블루라이트 요코하마”,“오마이줄리아”,“Seasons In The Sun”, “깐빠이” 이런 곡이었다. 이후 90년대 중반에는 X-Japan이란 밴드의 음악이 암암리에 국내 매니아들에게 이슈가 됐고, 그 음반을 구하지 못해 안달했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왜 금지된 것, 하지 말라는 것에 암묵적인 관심을 그리도 가졌을까? 금지의 시대, 불법에 대한 추억이 유튜브 영상하나로 떠올랐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
국민의 정부, DJ정부기간인 1998년부터 2004년까지 4번에 걸쳐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순차적으로 이뤄졌다. 그러니 그 이전에는 금지의 시대였다는 말이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조금이라도 일본 문화나 일본풍을 띄면 왜색이라고 해서 양성적으로 금기시됐던 시대였다. 방송과 사회 문화 전반의 분위기에서는 금지했지만, 문제는 음성적으로 이런 금지된 것을 열망하는 시대였다. 단적으로 아무리 금지해도 어떻게든 파고드는 문화의 속성이 그대로 반영됐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전에도 일본 애니메이션은 버젓이 방송국에서 방송되지 않았던가? “은하철도 999”,“들장미 소녀 캔디”,“미래소년 코난”,“마징가 Z”,“케산”,“아톰”,“독수리 5형제”,“피구왕 통키”,“요술공주 밍키”, “에어리어 88” 등등 헤아리기도 힘든 수많은 애니메이션들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봐왔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드레곤볼”,“시티헌터”,“북두신권”,“슬램덩크”등 일본의 수많은 만화나 애니메이션은 국내 만화 잡지와 출판사와 방송국에서 수입해 등장인물 이름과 배경만 한국식으로 바꿔서 판매하거나 방영하지 않았던가? 심지어 어릴 때 봤던 지상파에서 방영된 만화 영화는 거의 다 일본 원작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고 충격에 빠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미 80년대 초반부터 일본 영화나 드라마, TV방송은 불법 복제 비디오로 가수들의 음반은 이런 불법 테이프나 LP로 이후에는 CD가 돌아다니며 음성적으로 널리 퍼져있던 상황이었다. 1980년대 한국이 소비 사회로 진입하면서 일본 노래는 다운타운에서 대놓고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때 들어와 유행한 음악이 바로 “긴기나기니”같은 노래였다. 이 당시 가수로 콘도 마사히코, 마츠다 세이코, 안전지대, 윙크, 나가부치 츠요시 등이고 90년대에는 X-Japan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안전지대라는 간판을 건 일본풍의 옷 가게 체인점도 있었다.
더 큰 문제는 당시 방송 프로그램 포맷이나 캐릭터, 일본 노래에 대한 표절이 어마무시하게 이뤄지던 시절이었다. 공식적으로 일본 문화가 개방되지 않았으니 방송포맷을 잡기 위해 일본에 출장을 간다는 소문은 알 사람은 다 아는 얘기였고, 국내 시장에 들을 수 없는 일본 노래들이 표절의 대상이 됐다. 일본에 가서 좋은 노래들의 멜로디를 그대로 베껴오거나 비슷한 분위기의 컨셉을 유지한채 버젓이 표절한 사례는 찾아보면 차고 넘친다. 90년대가 아마 이런 음악이 가장 널리 유행했던 시기였다. 극단적인 예가 룰라의 표절시비 “천상유애”가 그 정점을 찍었다. 대놓고 카피하는 수준이었으니 대중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줬다. 현재 유튜브 시대를 맞이하면서 그 시절 표절곡들이 양파 껍질 벗겨지듯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일본 노래를 몰래 가져와 발표했다 표절로 걸리면 뒤늦게 번안이라는 이름으로 작곡가 표기를 은근슬쩍 바꾸는 꼼수를 부리기도 했고, 이마저도 나중에는 아예 일본 노래를 대놓고 번안곡으로 발표해서 히트하는 경우도 많았다.
긴기나기니 사리케나쿠
콘도 마사히코는 1980년대 이름을 날렸던 일본의 유명 엔터테이먼트 회사 쟈니스 소속 아이돌 가수였다. 콘도 마사히코의 가장 대표곡이 바로 “긴기나기니 사리케나쿠”였다. 이 노래는 원래 1981년에 발매되면서 일본에서는 컨셉을 잘 잡아서 8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는 히트곡이었다. 그가 입었던 점퍼와 헤어밴드 패션 역시 인기를 엄청 끌었다. 단 노래 실력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고 전해진다. 사실 콘도 마사히코 노래 중에 아는 곡은 “긴기나기니” 이 노래 밖에 없다.
일본에서 1981년 발표된 노래가 한국에서는 1983년경 부산에 상륙했고,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1984년 즈음 서울에 도착했고 전국적으로 유행한 댄스곡이었다. 소위 로라장 음악 중에 한 곡이었으며 방송에서는 절대로 들을 수 없었지만 길거리나 로라장에서는 끊임없이 흘러 나왔다. 길보드 차트 길거리 리어커에서 파는 불법 음반에는 모두 이 노래가 수록되어 있을 정도였다.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었지만 불법으로 암암리에 모두 듣고 아는 노래였다. 단지 TV와 라디오에서만 못 듣는 노래였고 실제로 금지곡인 걸 모르고 방송국에 신청곡 엽서를 보낸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이후 20년 정도 지난 2003년에 ‘큐빅’이라는 국내 남녀 혼성그룹이 “기나 긴”이라는 제목으로 번안해서 이곡을 발표한다. 그때 들었을 때도 살짝 반갑기는 했지만 느낌이 많이 달라서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큐빅이 이 노래를 발표하고 어느 정도 알려지기도 했었지만 대중들이 기억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어찌 됐던 번안곡이라는 형태를 취했지만 라디오에서 공식적으로 이 노래를 들었던 건 큐빅이 부른 버전이 처음이었다.
사실 이런 식의 일본 노래 번안곡이 쏟아져 나온 시기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컨츄리꼬꼬 “오마이줄리아”도 그렇고 캔 “내생애 봄날은”, 이수영 “얼마나 좋을까”, MC The Max “잠시만 안녕”, 포지션 “I Love You”, 박효신 “눈의 꽃” 등이 얼핏 생각나고 “와 이 노래 원곡이 일본 노래였어?” 할 만한 노래들은 차고 넘친다.
그런데 2024년 4월 9일에 방송된 MBN의 한일 음악대결 컨셉의 예능 프로그램인 <한일가왕전>에서 일본 측의 참가자인 고등학생가수 스미다 아야코가 1:1 라이벌 전에서 추억 속의 그 노래 “긴기나기니”를 커버해 불렀다. 본방 이후 단독 영상의 조회수가 무려 166만에 달하는 등 폭발적인 반응이 일고 있다. 라이벌 전에서 스미다 아이코가 이겼어야 했다는 반응도 압도적이었다.
아마도 이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추억샘을 폭발시키지 않았을까 유추된다. 심지어 성원에 힘입어 MBN 공식채널에 한시간 버전도 업로드 되는 기염을 토하며 떡상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