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숙형 LP(Vinyl)

다시 생각해 봐도 가요계의 황금기는 1990년대였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이 쏟아져 나왔고 음반 판매량도 호황이었다. 가수들도 앨범 발매가 활발해 경쟁도 무척 치열했고 한두 장 앨범 발매가 이뤄지고 사라진 가수부터 뒤늦게 재조명되는 가수까지 다양한 시장이었다. 발라드와 댄스로 양분된 시장 외에도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이 특히 실험적인 음악들까지 발매될 수 있었던 토양도 형성된 시기다. 퓨전재즈부터 국악, 헤비메탈, 프로그레시브 록, 모던록 등등 다양한 음악들이 등장했고 장르적인 측면에서도 가장 왕성했던 시기였다. 김숙형 LP (Vinyl) 사진.

그리고 LP(Vinyl)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었다. 1994년을 기점으로 LP(Vinyl)은 CD로 전환됐던 시대였다. 지금 보면 아쉬운 대목이고 LP 끝물에 발표됐던 LP들은 발매량 자체가 적어서 고가에 거래되는 상황이 됐다. 극소량 제작된 음반은 그 희소성과 희귀라는 딱지를 달고 구하기도 쉽지 않고 구한다고 해도 높은 가격에 깜짝 놀랄만한 음반들이 많다. 호황과 플랫폼(매체)의 변화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한 장의 앨범만 발표하고 사라진 가수들도 많았다. 김숙형도 마찬가지다.

생소한 이름의 김숙형도 딱 한 장의 앨범을 발매하고 유학길을 올라서 더 이상 음반은 만날 수 없지만, 이 한 장의 앨범은 누군가에게는 귀하디귀한 음반이 됐다. 한림전자그룹을 경영하는 아버지 김해중의 장녀로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수영, 골프, 수상스키도 그 시절에 이미 프로급에 가까울 정도로 다재다능하고 음악에도 두각을 드러냈다. 1970년생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할 즈음 정확히는 대학교 4학년 때 스튜디오에 들어가 1년 동안 앨범 작업을 했다. 그리고 첫 번째 앨범이 1993년 5월에 발표됐다.

당시 가요계 주류 음악은 확실히 댄스와 발라드로 양분돼 있었고, 재즈 음악들이 유행처럼 쏟아져 들어왔던 시기였다. 김숙형 1집 앨범은 Jazz와 Pop을 접목시킨 앨범이었다. 정통 재즈나 스탠다드 재즈는 확실히 아니었고 팝필을 가미한 세련된 음악이었다. 일부 곡에서는 재즈와 블루스 느낌도 묻어나고 곡들로 채워져 있다.

타이틀곡은 김진룡 작사-작곡의 “누군가”라는 곡으로 재지한 리듬과 멜로디에 팝을 가미한 노래로 김숙형의 색깔을 가장 잘 드러내는 매력적인 곡이다. 앨범 전체적으로 악기 구성도 색소폰과 아코디오, 피아노가 주를 이루면서도 대중적인 듯 블루스적인 느낌까지 묻어난다.

지금은 성인가요와 노래 강사로 활동 중인 송광호 작곡가가 만든 곡 “힘들지만”은 스윙재즈 스타일의 곡으로 단순한 듯 귀에 쏙 들어오는 듣기 편한 곡이다. 앨범 전체가 고급진 팝재즈를 지향하는 앨범이었다. 솔직히 당시 분위기에서는 팔릴만한 돈 될만한 앨범은 절대 아니었다. 그럼에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음악을 밀어붙여 앨범발매까지 이뤄낸 뚝심은 인정할 만하다.

1993년 당시 기준으로는 퓨전재즈와 가요의 중간지점이기도 하고, 다양한 색깔이 묻어나는 앨범이었다. 그런데 앨범을 발매하고는 활동 자체가 전혀 없었다. 이 앨범을 발표하고는 미국 유학을 떠났다. 당시 자료를 찾아보면 한번 불리다 잊혀지는 노래보다는 들을수록 오래 남는 노래로 대중적 인기보다는 자신의 음악과 노래를 좋아하는 몇 사람의 팬만 있어도 감사하다는 말을 남겼다.

세션진도 화려하다. 1990년대 최고의 세션들로 채워져있다. 특히 눈에 띄는 이름들이 많은데 색소폰의 이정식과 아코디언의 심성락의 참여가 이 앨범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어떻게 보면 자기만족에 가까운 앨범이고 전혀 홍보도 이뤄지지 않았다. 이름 자체는 생소하지만 앨범의 퀄리티는 높은 편이다. 부유함은 많은 것들을 가능하게 했겠지만, 무엇보다 60년대 복고풍의 뮤지컬 스타일의 재즈 음악을 사랑했던 김숙형의 느낌을 앨범을 통해 느낄 수 있다. 자기 자신만의 음악 세계에 충실하고 싶다는 의지도 엿보이지만, 아쉬운 것은 이 앨범이 마지막이란 것이다.

유학 이후 김숙형은 가업을 물려받아 한림전자 대표가 됐다. 김숙형 1집에 수록된 노래들은 1994년 “또 다른 기쁨 이희진 – 용서”라는 서울의 달 삽입곡이 수록된 컴필레이션 앨범에 3곡이 그대로 실려 CD로 발매됐다.

“힘들지만”,“누군가”,“그사람” 실제로 김숙형이 발표한 노래는 총 8곡이 전부다. 이 8곡으로 그녀의 모든 것을 평가해야 한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적어도 8곡은 일정 수준 이상의 가능성을 남겼고, 적어도 그 시절 대중들의 귀를 잡아 끌지는 못했지만, 일부 팬들에게 좋은 음악으로 기억에 남아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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