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효신이 데뷔했을 때 그의 목소리를 듣고 바로 떠오른 예전 가수가 한 명 있었다. 바로 “토요일은 밤이 좋아”, “사랑이 저만치 가네”를 불렀던 김종찬이었다. 당시 김종찬의 목소리에 붙었던 별명은 ‘백 만 불짜리 목소리’였다. 요즘에는 노래 쫌하는 가수들에게 백 만 불짜리 가수, 꿀성대 이런 수식어를 많이 쓰긴 하지만 그때까지 ‘백 만 불의 목소리라니?’ 피식 웃음이 날 정도로 표현이 웃겼다. 그럼에도 초등학생의 눈과 귀에 비친 김종찬은 정말 매력적인 허스키한 목소리를 지녔고 노래도 너무 잘했다. 가요톱10에서 처음 본 모습은 “사랑이 저만치 가네”라는 곡이었고 느끼하지만 중후한 목소리에 허스키했고 노래를 설렁설렁 아주 쉽게 부르는 것 같은데 그 느낌을 아무도 살릴 수 없는 묘한 매력이 철철 넘쳐났다. 이후에 발표한 곡 중에 “아름다워라 그대”, “느낌”, “산다는 것은”을 좋아했다. 김종찬 Story.
김종찬 데뷔와 2집
1977년 대학가요제의 출현은 막연하고 어렵게 생각한 가수 데뷔의 문을 일반인들에게 열어준 변화의 시작이었다. 그 인기로 인해 방송사마다 별별 가요제가 다 생겨났고 이런 가요제를 통해 가수 지망생들이 음반관계자의 눈에 띄어 자연스럽게 가수 데뷔하는 상황까지 이어졌다. 지금으로 보면 각종 오디션프로그램과 일맥상통한다. 이런 가요제는 가수들의 등용문이었고 여기에서 수상해야 그나마 어디 가서 명함이라도 내밀 수 있는 상황이었다. 김종찬은 1981년 서울 엔터프라이즈 가요제에서 우승했지만, 데뷔는 쉽지 않았다. 그의 1집 앨범이 나온 것이 1986년이었으니 무명시절이 있었다.
김종찬은 이때까지 누나가 운영하던 서울 방배동 라이브카페에서 노래하고 있었다. 당시 라디오 DJ로 활동하던 배우 김희애가 그곳을 자주 찾았는데 그의 노래를 듣고 음반사에 연결시켜 줬다고 한다. 그렇게 1986년 1집 앨범 <Dream Rain>이 발표되는데 이 앨범에는 조덕배가 작사-작곡한 “내 사람아”이 나름 괜찮은 반응을 받으며 활동을 시작하는데 생각보다 조용히 입소문만을 탈 뿐이었다. 이 노래 정말 좋았는데 왜 많이 알려지지 못했을까 아쉽기만 하다. 지금 들어도 참 세련됐다.
이 앨범에는 하광훈 작곡, 지예 작사의 “비”라는 노래도 수록되어 있었고 지금 들어도 1986년에 발표된 이 두 곡은 꽤 세련된 곡이었지만 그 가능성만 남긴 앨범으로 남게 된다. 첫 앨범부터 임팩트 있는 데뷔는 아니었다. 당시 신인들이었던 하광훈, 지예, 함경문, 이호준 등의 음악인들이 힘을 모아 만든 앨범이었고 김종찬이란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앨범이었다. 그리고 1집 수록곡 중에 하광훈의 곡 “비”는 2022년에 김현철이 리메이크하기도 했었다.
1987년 2집 앨범이 발매된다. 1집의 멤버들 하광훈, 지예, 이호준에 더해 도시의 아이들의 김창남, 유영선과 커넥션의 유영선 등이 더 투입되어 2집을 발표한다.
이때까지 거의 무명 가수였던 김종찬을 스타덤에 올린 히트 앨범이 바로 2집인데 이 앨범에는 타이틀곡 “사랑이 저만치 가네”,“토요일은 밤이 좋아”,“당신도 울고 있네요” 무려 3곡이 가요톱10에서 1위를 차지하며 연달아 크게 히트한다. 사실 당시만 해도 앨범 한 장에서 1곡 히트하기도 힘들었는데 무려 3곡은 엄청난 기록이었다. 그야말로 초대박을 터트렸다. 재밌게도 이 앨범은 발매 즉시 히트하진 않았다. 1987년에 앨범이 나왔지만, 서서히 반응이 오더니 해를 넘긴 1988년에 각종 방송과 길거리에서 이 노래들이 울려퍼졌다. 김종찬의 허스키하면서도 고음이 깨끗한 보컬스타일이 더욱 화제가 되면서 백 만 불짜리 목소리라는 별명도 이때 붙게 된다.
김종찬 3,4집
1989년에 발매된 3집 앨범 <눈물 너머로 보이는 그대>에서는 타이틀곡 “아름다워라 그대”로 활동을 이어갔지만 2집의 성공 이후 3집은 아쉬운 성과만을 남겼다. 3집 앨범의 완성도나 성취가 부족한 것이 아닌 2집에 비해서 아쉬울 뿐이었다. 어찌 보면 김종찬의 3집이 소포모어 앨범이었다.
사실 1집부터 이어진 앨범컨셉과 구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나 시대가 바뀌고 있었다. 댄스곡과 발라드의 적절한 혼합배합은 기존에 하던 방식 그대로였고 노래도 나쁘지 않았지만 가요계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3집은 내실을 기하고 음악적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 작곡과 편곡에 힘을 줬다. 특히 3집에 참여한 제작자는 김광수였다. 1985년 인순이의 매니저로 연예계에 입문해 GM기획을 설립하면서 수많은 가수를 키워낸 인물이다. 이런 김광수가 초기에 손을 잡았던 것이 바로 김종찬이었다. 윤상, 김민우, 조성모, 터보, SG워너비, 다비치 등 손 만대면 가수들을 스타덤에 올린 인물이었다. 김광수가 초기 제작한 앨범이 바로 김종찬 3집이었다.
하지만 앨범은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명확한 타겟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 애매한 앨범이 됐다. 20대와 50대까지 모두 아우른 욕심이 과했다고 본다. 2집에서 히트한 곡들과 비슷한 노래들과 심지어 트로트풍까지 뭐하나 얻어걸리라는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앨범이 3집이었다. 하지만 어느 하나 얻어걸린 건 없었고 그저 그런 앨범이 3집이었다.
기존 소속사와의 계약 만료 이후 자제 제작한 정규 4집은 당시로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어떤 제대로 된 홍보도 없었고 결과물에 비해 아쉬운 성과만 남겼다. 개인적으로 김종찬 노래중에서 가장 좋아했던 노래는 4집에 수록되어 있던 “느낌”이란 노래다. 당시 마크 알몬드(Mark-Almond)나 로드 맥퀸(Rod McKuen)의 음악을 자주 들었다고 하는데 앨범에서 마크 알몬드(Mark-Almond)의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완전 저평가된 앨범인데 다른 앨범에 비해 오히려 더 좋은 컨셉과 균일한 앨범 수록곡들이 있어 나쁘지 않다.
3집 이후에 소속사와의 계약과는 상관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하고 싶은 뮤지션의 욕심이 그대로 담겨있었지만, 기존의 앨범홍보와 부수적인 사업적인 요소를 생각 못 한 일종의 시행착오가 큰 앨범이 바로 4집이었다. 4집에 참여한 작곡가는 기존의 이호준은 그대로 였지만 다섯손가락의 이두헌과 박광현의 참여가 눈에 띈다.
4집의 음악적 성취보다 제대로 된 그 어떤 홍보도 없었고 아쉬움만을 남긴 앨범이 됐다. 이로 인해 김종찬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덕분에 앨범홍보 활동과 그 어떤 비디오 클립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음악에 대한 의욕은 앞섰지만, 결과로 이어지지 못한 정말 아쉬운 앨범이 바로 4집이다. 개인적으로 김종찬 앨범 중에서 가장 인정받아야 할 앨범은 바로 4집과 5집이다. 이 시기 김종찬의 일본시장 진출에 보다 적극적이었으며 5집 발매와의 공백이 있다.
5집과 은퇴 이후
김종찬 5집 기존 소속사와의 계약 만료 이후, 자체 제작한 정규 4집의 실패로 좌절한 김종찬은 절치부심으로 5집을 내놓았다. 타이특곡 “산다는 것은”이 동명의 SBS 주말극장 주제가로 쓰이면서 소소하게 인기를 끌었다.
사실 이 앨범은 기존의 김종찬 이미지를 깨기 위해 발라드, 팝, 리듬앤블루스, 보사노바 등 각기 다른 색깔의 8곡을 만들어 개성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역점을 두고 앨범을 만들었다.
이 앨범에서는 김종찬은 작곡에도 참여를 하게 되는데 작곡가 김진룡과 함께 6개월간 상의와 창작에 심혈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리고 작사가로 활동했던 가수 지예가 절반이 넘는 가사를 선물했는데 이는 장르는 다르지만 어느정도 하나의 톤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 피노키오로 활동했던 김성면 그리고 윤상의 파트너 박창학 작사가도 그의 컴백에 힘을 보탰다. 김진룡 작곡가가 프로듀싱에 참여했고, EOS 1집 히트 일등공신 안윤영 작곡가, 히트곡 제조기 이호준 작곡가, 세션으로 꾸준했던 유지연, 최희선 기타리스트 등도 작곡과 편곡에 이름에 올렸다. 또한 코러스에 장필순 등이 참여했지만 이 앨범이 그의 마지막 앨범이 됐다.
개인적으로 수록곡 중에 “멈추지 마”는 박창학 작사와 특유의 희망찬 가사가 인상적인 곡으로, 김종찬의 가성을 사용한 창법과 랩에도 도전하는데 나지막한 랩도 인상적이다. 장필순의 부드러운 코러스는 더없이 좋다. 이 당시 발표된 가요앨범에 장필순의 이름을 많이 볼 수 있었던 이유를 확인할 수 있다. 재밌게도 이 시기에 발표된 앨범 중에는 김종찬이 코러스로 참여한 앨범들도 종종 볼 수 있다. 조정현을 비롯한 비슷한 다른 가수에서 심심찮게 김종찬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도 김종찬 노래를 들어보면 정말 노래를 잘한다고 느껴질 만큼 좋은 곡들이 많다. 1980년대 중반에 등장해 1990년대 중반까지 활동을 했지만 2집과 3집의 인기와 전성기를 짧고 굵었지만 대기만성형 가수였다.
이후 사업가로 변신을 해 개인사업을 했지만, IMF로 당시 부도가 났다. 이 과정에서 사기 혐의로 교도소에 들어가게 된다. 이때 교도관의 전도를 통해 기독교에 귀의하게 되면서 가스펠음반을 내기도 했고, 결국 신학 교육을 받고 전도사를 거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현재는 경기도 일산동구에 있는 교회 담임 목사로 활동 중이다. 그런데 목회활동을 하면서 과거 연예인활동에 대해서는 선을 긋고 있다. 목회자로 충실한 모습만 보이고 있다고 한다. 그 흔한 콘서트7080 출연조차 없을 정도다.
가수 중에 종교에 귀의한 가수들이 조금 있다. 대표적으로 윤항기, 홍수철, 조하문, 김종찬이 목사로 목회활동을 하기도 했었다. 당연히 본인의 재능을 살려 CCM 앨범도 발표하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아쉬운 것은 좋은 노래들을 많이 남겨 일반인들에게도 예전 추억을 회상할 수 있는 그 시절 노래를 무대에서 보여줬으면 하는 작은 바람은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