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트리오 Vinyl

한때 음악계에 트리오가 많았다.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정경화, 정명화, 정명훈 남매로 구성한 정트리오가 가장 유명하고 딱 떠오른다. 가요에서는 김트리오, 새샘트리오, 솔개트리오, 홍삼트리오, 트리오 여운, 얼굴상 때문에 이름 붙은 마삼트리오도 있고 주방세제 이름도 트리오다. 확실히 트리오가 많던 시대였다. 심지어 동명의 김트리오는 두 팀이나 있었다. 조용필이 멤버로 활동했고 김대환이 주축이 되어 이남이, 최이철 등과 활동했던 김트리오가 하나 있고, “연안부두”를 부른 김파, 김단, 김선 3남매로 구성된 가족 밴드 김트리오 가 있다. 

김트리오의 등장이전의 가요계 상황을 조금 짚어볼 필요가 있다. 1970년대 초반 전성기를 맞았던 대한민국 록 음악씬은 1975년 일명 “대마초파동”으로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많은 음악인이 미국으로 떠났고 남겨진 밴드 멤버들은 나이트클럽에서 일을 구해야만 했다. 심지어 밴드의 보컬들은 록 기반의 가요 히트곡들을 불러야 했다. 그리고 그 당시 가요 히트곡은 바로 트로트였다. 록 기반의 트로트 노래였고 절묘하게 섞인 일명 “트로트고고”,“트로트록”,“록뽕” 스타일들이 생겨났다. 고고장이 전국을 강타할 당시 트로트와 고고풍의 음악이 결합한 장르가 트로트고고로 전세계 한국에만 있는 유일한 장르되겠다. 대표적인 가수와 노래가 조용필 “돌아와요 부산항에”, 최헌 “오동잎”, 윤수일 “사랑만은 않겠어요”, 조경수 “아니야”, 최병걸 “진정 난 몰랐었네”, 함중아 “안개 속의 두 그림자” 등이다.

그리고 전면에서 활동할 수 없었던 1세대 밴드음악인들은 신인가수들에게 자신의 곡을 제공하고 프로듀싱과 편곡을 할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으로 이장희, 데블스 등이 있었다. 데블스는 이은하, 윤승희, 정난이와 같은 가수를 키워냈고, 이장희는 밴드 사랑과 평화를 뒤에서 지원해 줬다.

그런데 1970년대 후반 MBC가 시작한 대학가요제는 제2의 한국 밴드음악의 바람을 불어넣는 계기가 된다. 일명 대학 캠퍼스 그룹들이 싹을 틔운 계기가 된다. 샌드페블스, 블랙테트라, 활주로, 그리고 그 중심에는 산울림이 있었다. 기성 밴드와는 차별되는 독창성과 신선함을 무기로 들고 나와 큰 반향을 불러왔지만, 당시만 해도 아마추어리즘이 바탕에 깔려있었고 극복하기에는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그럼에도 전국의 캠퍼스 그룹들은 그룹사운드 붐을 만든 것은 확실했다. 이런 배경에서 대한민국의 밴드씬의 제2의 바람을 일으켰는데 본격적인 그룹사운드 활동이 다시 TV에 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 즈음 1977년 영화 한편이 전세계를 강타한다. 존 트라볼타 주연의 <토요일밤의 열기>였다. 디스코시대가 도래했다. 비지스(Bee Gees)를 선두로 도나 서머(Donna Summer), 칙(Chic), 글로리아 게이너(Gloria Gaynor), 어스 윈드 앤 파이어(Earth, Wind & Fire) 등 아니 사실 흑인음악을 기반으로 한 거의 모든 가수가 디스코열차에 탑승했다고 봐야 한다.

당연히 한국에도 상륙했고 대표주자가 희자매, 사랑과 평화, 티나황 가수들이었지만 사실 당시 활동하던 가수들은 평소의 음악 스타일과는 상관없이 김상희, 현철, 이용복, 송대관, 이은하 등등 역시 디스코 리듬을 가미한 노래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딱 이 지점에서 제2의 밴드 사운드 캠퍼스 그룹사운드 열풍과 디스코가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의 가요계의 분위기였다. 탱글탱글한 펑키그루브를 만들어 내야 했고 무엇보다 견고한 음악성을 요구했는데 거기에 적합한 팀이 바로 사랑과 평화, 들고양이들 그리고 김트리오가 있었다. 펑크와 디스코에 특화된 그룹들이었다. “트로트 고고 – 트로트 디스코”시대로의 전환이었다. 

들고양이들 VS 김트리오. 두 팀 다 해외파였다. 홍콩과 동남아를 기반으로 활동했던 들고양이들 와일드캣츠는 파워풀한 보컬 임종임이 이끄는 팀으로 디스코의 타이트한 리듬과 귀에 쏙 들어오는 한국 민요풍에서 영감을 받은 멜로디를 결합해서 “십오야”,“마음약해서”로 대박이 났다. 들고양이들을 제작한 제작사는 오리엔트 프로덕션이었고 김트리오는 안타 프로덕션에 계약되어 있었다. 안타기획에는 당시 인기 정상을 달리던 최헌, 윤수일, 희자매가 소속되어 있었고 “연안부두”로 안타기획을 대표하는 얼굴로 급부상했다. 

김트리오 VS 산울림. 어떻게 보면 김트리오 3남매구성은 산울림 3형제와 비슷한 면이 훨씬 더 많았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을 했지만 지향하는 바는 확실히 달랐다. 산울림은 그 어디에서도 들어보지도 못한 독창성과 실험성을 가진 밴드였고 당시 조류가 펑크록과 디스코로 양분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볼 때도 펑크와 사이키델릭 록을 결합한 특이한 음악세계관은 한국에서는 유일무이한 밴드였다. 하지만 높은 창의성에도 불구하고 연주력에 대한 의구심과 프로듀싱과 편곡에 대한 아쉬움은 늘 따라다녔고 이런 이유로 당시로는 과소평가되기도 했었다. 이에 반해 김트리오의 연주력은 이미 테크닉적으로도 당시 최고의 테크닉을 구사하고 있었다. 오로지 이 두 팀이 형제들로 이뤄진 가족밴드라는 공통점뿐이었다.  

김트리오는 첫 타석에서 홈런을 친 그룹이었다. “연안부두”는 발표하자마자 대박이 터졌다. 미국에서 들어온 3남매는 동시대의 캠퍼스 그룹사운드와는 확실히 결이 달랐고 굉장히 전문적인 연주 실력을 갖춘 팀이었으며 트로트고고풍의 가요계에 버전업된 트로트 디스코를 들고 나왔다. 멜로디는 확실히 트로트 기반이었고 리듬만 디스코 기반인 대표적인 트로트 디스코 곡이었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한국적인 댄스곡이었다. 멜로디와 가사는 슬픈데 리듬은 신나고 춤을 출 수 있는 뭔가 언발란스한 틈새에서 오는 이질감과 정서가 분명히 존재했다. 이 노래는 1979년 발표된 지 3개월 만에 5만장이상이 판매됐고, 1980년 각종 TV 가요 시상식에 들고양이들, 노고지리, 벗님들, 희자매와 함께 김트리오도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김트리오는 김파, 김단, 김선 3남매로 구성된 가족 밴드였다. 아버지는 미8군 쇼단 전성기에 유명했던 트럼펫 주자 베니김(김영순)이었고, 어머니는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부른 가수 이해연이었다. 1973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자식들은 미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냈고 각자 다른 악기를 전문적으로 배웠다.

대표적으로 김트리오의 첫째 김파는 기타 베이스, 드럼, 트럼펫, 트럼본, 피아노, 타악기 전반을 다뤘고  둘째 김단은 기타, 베이스, 트럼펫을 막내 여동생 김선은 피아노, 오르간, 무그, 드럼, 플롯, 트럼펫, 타악기 전반을 배웠을 만큼 다양한 악기들을 자유자재로 다룰줄 알았다. 실제 무대에서는 김파가 드럼, 김단이 기타, 김선이 건반과 보컬을 담당했었다. 1979년 7년만에 귀국한 김트리오는 아버지 베니김과 8군 시절부터 친분이 있었던 안치행이 창철한 안타기획과 계약까지 하게 된다. 

이 데뷔 앨범은 기본기가 탄탄한 멤버들의 화려한 연주가 담겨있다. 멋진 인트로는 기본이고 절묘한 기타연주, 특히 베이스라인은 이전에 가요에서 듣기 힘든 테크닉을 만나볼 수 있는 슬랩 베이스를 들어볼 수 있다. 그리고 쉴 새 없이 두드려 대는 펑키한 드럼은 다시 들어도 매우 훌륭한 연주들로 동시대 최고 연주력을 자랑했다. 사랑과 평화의 호적수로 불릴 정도로 진보적이었다고 하는데 오히려 이들보다 어린남매들의 연주력이 돋보이기까지 했다. 

특히 1집에 눈에 띄는 트랙중에 하나는 검은나비 출신의 김기표가 작사-작곡한 “꿈속의 님아”는 통통튀는 슬랩베이스 명곡으로 이 당시 이런 비트를 쪼개는 김트리오의 연주력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앨범 첫 번째 트랙 김파가 작곡한 “낙서”는 빠른 속도감이 넘치지만 이들의 연주력이 얼마나 탄탄한지를 대번에 확인할 수 있는 트랙이었다. 또, 막내 김선의 건반연주와 작사-작곡으로 이뤄진 “저 하늘 끝까지”는 흑인 소울음악에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다. “연안부두”의 다음트랙에 위치한 “살짝이 말하겠어요”는 “연안부두”와 비슷한 타령조의 멜로디에 펑키한 디스코 넘버로 끊어치는 기타톤이 돋보인다. 

김트리오의 가장 대표곡은 단연 “연안부두”다. 인천 중구에 있는 연안부두를 소재로 한 이 노래는 인천시민이 뽑은 인천을 상징하는 대표적 대중가요로 프로야구 SSG 랜더스 응원가로 사용되고 있다. 이 곡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르지만 결국 발목을 잡은 건 이 “연안부두”였다. 이 곡의 성공은 오히려 독이 됐다. 김트리오가 기본적으로 이루고자한 음악스타일과 대중성의 접점을 찾은 결과였지만 다른 곡들은 숨은 명곡들이 포진하고 있었고 두 곡의 번안곡도 수록되어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미래지향적인 비전의 곡도 가득했다. 당시 프로그레시브 디스코라는 장르로까지 불리면 세련된 멜로디와 미국 디스코를 한국에 전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그 시절 그곳의 분위기와 대중들이 원하는 곡은 “연안부두”와 같은 음악이었다. 

대히트곡 “연안부두”로 가장 주목받은 밴드가 됐고 1년 후 후속 앨범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2집은 TV출연을 유리하고 특화된 김선의 솔로앨범으로 기획된 듯했다. 타이틀자체가 “선이”라고 쟈켓에 표기되어 있었고 당시 인터뷰내용에서 유추해 보면 셋은 나이트클럽은 계속 할 것이지만 방송에서는 솔로 가수로 활동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당시 가요계의 분위기가 혜은이, 이은하, 윤시내와 같이 밴드 보컬출신의 여가수들이 TV 방송 활동에 유리한 것이 솔로활동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당시 TV 방송환경도 어느 정도 작용했고 안타기획에서 제작된 다른 가수들의 이력을 보아도 밴드 경험이 있는 솔로가수들을 전문으로 한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특히 발표된 2집 앨범에는 데뷔 앨범과는 달리 김선이 부른 곡이 더 많았고 편곡도 화려한 편이었다. 

하지만 1980년 발표된 2집은 김트리오 이름을 달고 발표됐다. 2집에서 눈에 띄는 트랙은 단연 장덕이 작사하고 김파가 작곡한 “사랑은 영원히”가 귀에 쏙 들어온다. 2집의 타이틀은 “꽃띠여자”였는데 이곡은 트로트풍에 가까운 느낌의 곡이었지만 “난 어떡해”, 슬랩 베이스가 귀를 잡아끄는 “똑딱똑딱”은 김파의 작곡으로 만들어진 노래로 앨범의 다른 곡보다 세련되고 통통 튀는 펑키넘버들로 김트리오가 하고 싶은 음악이 이런 곡들임을 확실히 밝히고 자신들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보여준다. 

같은 노래인데 이 버전으로 들어보라. 아련함과 애틋함이 가사에 잘 녹아있고 당시 어린나이지만 감정선이 풍부한 김선의 목소리를 들어볼 수 있다.

그리고 뉴트로 분위기로 이 앨범에서 가장 주목받는 트랙은 드러머 김단이 가장 좋아하는 곡이라고 밝힌 “그대여 안녕히”는 화음위주의 깔끔한 편곡과 멜로디가 돋보이는 곡이다. 이런 트랙은 시대와 상관없이 지금들어도 그 세련됨이 그대로 느껴지는 트랙이다. 사실 비지스(Bee Gees)의 “Too Much Heaven”이 연상되는 구성과 편곡으로 2집의 깔끔한 마무리를 할 수 있는 트랙이다. 그런데 이 노래가사처럼 “그대여 안녕히”로 정식 활동의 마침표를 찍게된다. 

결국 시대를 훨씬 앞선 음악과 연주를 보여준 김트리오는 두장의 정규앨범과 한 장의 크리스마스 캐롤앨범을 발표한 뒤, 미국으로 돌아갔다. 출중한 실력이 아쉽지만 공식적으로 은퇴하고 현재 종교 생활을 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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