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미 Story

초등학생이었던 84년인지 85년인지 TV를 보다가 나미의 “빙글빙글”을 처음 봤다. 초딩이 나미를 봤을 때는 단발머리 못난이 인형처럼 보였다. 어린이 눈에 비춰진 나미는 누나는 확실히 아니었고 이모정도의 느낌이었지만 특유의 콧소리 비음으로 부르는 그 노래는 중독성 한 스푼 가득 머금은 노래였다. 제목처럼 어질어질 할 정도로 즐겨들었고 따라 불렀다. 나미의 첫 이미지는 TV에 나와 “빙글빙글”을 부르던 모습이었고 두 번째 기억되는 모습은 나미의 붐붐 시절의 토끼춤을 추며 “인디언 인형처럼”을 부르던 모습이었다. 어린 시절에 기억하는 나미는 이 두곡이 전부다. 후에 015B가 리메이크해 부른 ‘슬픈 인연’은 나중에 나미 노래인걸 알았고, 역시 “영원한 친구”도 마찬가지다. 나미 Vinyl 이야기.

1956년생으로 동두천 미군기지 부근 레코드 가게 주인의 딸로 태어났다. 레코드 가게를 했기 때문에 아주 어릴 때부터 음악과 매우 친숙했고 아버지 가게를 오며 가며 들른 미8군 무대 밴드 마스터들과 친했다고 한다. 연예계 데뷔가 1967년이라고 하는데 12살에 이미자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엘레지의 여왕>에서 이미자 아역을 다음해 윤복희 일대기를 다룬 <미니 아가씨>에서 윤복희 아역을 각각 연기하면서 데뷔했다. 아마도 미8군 무대의 밴드 멤버들이 영화 관계자에게 노래 잘 하고 끼있는 아이가 있다고 추천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나미는 학교를 전혀 다니지 않았다. 태어나면서 가수의 길로 뛰어들었다고 봐야한다. 이미 10대 시절인 1970년경 여성 5인조 밴드 <해피돌즈>에 막내로 들어가 그룹의 보컬과 소프라노 색소폰을 연주했다. 당시 이미 나미는 미8군 무대와 일반 업소에서 검증받은 스타였다고 하는데 이때 해피돌즈는 베트남 위문공연을 다녔고 실제로 많은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1973년 귀국하는데 당시 유니버샬 레코드사의 제안으로 미국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향한다. 하지만 미국 첫 무대는 만만하지 않았다. 공연 중단을 통보 받고 대대적으로 레퍼토리를 재정비해 미국 진출 3개월만에 라스베가스의 알라딘 호텔에서 극찬을 받으며 미국 데뷔 무대를 가졌다. 1974년 당시 앨범을 하나 발표하는데 캐나다에서만 발매된 <해피돌즈>의 유일한 앨범이었다. 

펑키넘버 Average White Band의 “Pick Up The Pieces”만 들어봐도 실력파 밴드임을 알 수 있다. 비음섞인 소울 넘버 “Misty Blue”, 유일한 한국어 노래 “봄비”가 매력적이다. 앨범에는 본명인 김명옥(나미)의 영어이름 OGIE. KIM으로 표기 되어 있다. 나미의 첫 번째 레코딩 앨범이자 나미의 음악적 출발점이었다.

그런데 1978년 겨울, 해피돌즈는 어이없이 해산하게 된다. 7년만의 휴가로 귀국했는데 나미 집안의 형편이 너무 어려워져 차마 두고 볼 수 없어 출국을 포기하고 국내 활동을 결심하게 된다. 이렇게 해피돌즈는 자연스럽게 끝을 맞이하게 된다. 

나미는 국내에서 호텔과 클럽을 돌면서 공연을 하던 중 소공동 조선호텔에서 이탈리아 뮤지션 프랑코 로마노를 만나게 된다. 프랑코 로마노는 나미를 매우 마음에 들어 하면서 나미를 제대로 된 가수로 만들어줬다. 1979년 밴드명 <나미와 머슴아들>을 결성하고 1979년 “영원한 친구”로 국내 정식 데뷔하게 되는데 이 곡은 지금까지도 나미의 초기 히크곡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노래다. 같은 앨범에는 “미운 정 고운 정”도 수록되었고 이 노래는 영화 <밀수>에서도 쓰였다. 

하지만 지지해 주고 프로듀싱까지 담당했던 프랑코 로마노가 1981년 병으로 사망하면서 팀은 자연스럽게 해체된다. 이후 나미는 솔로로 박춘석 사단으로 넘어가 ‘마지막 인사’ 다음 앨범 <나미 83> 등을 발표하지만 인기는 짧았다.

1984년에 발표된 댄스곡 “빙글빙글”이 폭발하면서 완전한 히트가수 반열에 올라가게 되고 상승세를 탔다. 1985년 상반기 한국 최고의 히트곡으로 꼽히며 이 노래는 전국을 들썩이며 게 만들었다. 이 노래는 <나미 골든앨범>에 수록되어 있다.

영화 <써니>에서도 이 곡이 얼마나 인기 있었는지가 잘 표현돼있다.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신스팝 장르를 발 빠르게 도입하면서 국내에서 이전까지 들어보지 못한 신선한 사운드의 노래가 바로 “빙글빙글”이었다. 이 곡은 사랑과 평화의 키보디스트 김명곤의 곡으로 이 곡의 인기로 김명곤 또한 최고의 작곡가이자 편곡가로 평가받게 되는데 바로 뒤이어 발표한 4집은 김명곤과의 협업으로 완성된 앨범이었다.

4집은 나미 음악 인생에 있어서 의 최고의 명반으로 평가받는다. 1985년 타이틀 곡 “슬픈인연”과 “보이네”로 1986년 역시 최고의 한해를 보내며 전성기를 누린다. 단순한 댄스 음악이 아닌 펑크, 소울, 어덜트 컨템포러리, 록 음악과 레게까지 다양한 장르가 골고루 담겨 있으며 나미 특유의 비음이 더욱 강해진 목소리도 곡들에 더없이 잘 어울렸다. 독창적인 음악성과 대중적인 성공까지 거머쥔 앨범이었다. 그리고 한때 “슬픈 인연”이 표절설이 나돌았지만 음반 발표 당시 합일합작 프로젝트에 참가한 일본인 작곡가인 나미에게 선물한 곡이었다고 한다. “슬픈인연”은 뒤늦게 015B나 여러 가수들이 리메이크하기도 했었다. 

 

나미 5집 <Overture>는 앞선 4집에 비해 큰 성공으로 이어지지 못했지만, 장르 음악에 있어서는 4집의 연장선상으로 리듬 트랙과 선율에 걸친 신디사이저의 활용도가 더 높아졌고 기계적인 음향은 당시 외국의 팝 사운드를 표방하는 세련미가 있었다. “사랑이란 묘한거야” 신스록느낌의 “사과하나”, 개인적으로 좋아했던 멜로우 팝 “입술에 묻은 이름” 모두 매력이 돋보이는 곡들이었다. 이런 사운드를 가능하게 했던 건 당시 숨은 천재 프로듀서 연석원이 있었다.

1989년 정규 6집 앨범이 발매되는데 타이틀곡은 발라드 “미움인지 그리움인지”를 밀고 있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챠트에 올라간 곡은 “인디언 인형처럼”이 반응이 오기 시작하자, 컨셉을 180도 바꿔버린다.

클럽DJ 신철과 이정효 둘을 영입하면서 나미와 붐붐을 결성해 한국 최초의 DJ Remix Single을 정식 발매하며 TV브라운관에 등장했다. 인상적인 것이 붐붐의 바가지 머리와 그들이 추던 토끼춤이었다. 당시 학창시절 이 춤을 안 춘 친구들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굉장한 인기였다. 수업 쉬는 시간에 교실 뒤에 모여 다들 토끼춤을 췄던 모습이 선명하다. 가요톱텐에서 4주 연속 1위를 차지하며 최고의 인기를 모았다. 당시 나이가 34살의 나미가 DJ Remix 앨범을 내고 흑인음악을 도입해 토끼춤을 추며 가요계를 휩쓸고 다녔으니 당시 나미의 인기와 저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1992년 7집 앨범을 발매하지만 발표될 당시 이 앨범은 철저히 시장에 묻혀버린다. <카멜레온>이란 이름으로 발표한 앨범은 일종의 컨셉 앨범이었는데 발매 당시 가수 본인의 개인사로 인해 제대로 된 프로모션이 이뤄지지 않았고 시장과 가요계 분위기는 급변하는 분위기에서 앨범은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도 전에 잊혀졌다. LP나 CD발매량도 많지 않아 한때 희귀앨범으로 고가에 거래되기도 했다.

이 앨범의 프로듀서는 <유영선과 커넥션>의 리더였던 유영선이 맡아서 진행했는데 이 유영선은 스튜디오의 마술사라고 불리며 세련된 팝 사운드를 잘 뽑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었다.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시티팝 사운드와 미국의 R&B스타일노래, 아카펠라 음악도 포함되어 앨범명답게 카멜레온의 매력을 뽑아냈지만 앨범은 그대로 묻혀버렸다. 그런데 거의 30년이 지난 2020년 즈음 레트로가 다시 떠오르고 복고의 시티팝 바람이 불면서 “가까이 하고 싶은 그대”는 한국 최고의 시티팝 중 하나로 재조명되기도 했다. 2022년에 뒤늦게 LP로 재발매 되기도 했다.

사실상 7집이 정규앨범의 마지막이었고, 1993년 윤시내와 스페셜 듀엣앨범을 발표하기도 했었고 1996년에는 싱글앨범을 발표했지만 더 이상 TV에서 그녀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나미의 인기에 비해 그녀의 사생활은 거의 알려진 것이 없었다. 결혼과 관련된 온갖 루머가 나돌았지만 무엇하나 확인된 것은 없었다. 후에 밝혀지기를 이미 활동 당시 사실혼 관계였으며 아이도 있었는데 숨기고 활동했으며, 나미와 붐붐시절에 이미 첫째 아들이 국민학생이었다. 나미와 남편인 인물은 당시 연예계 실력자였고, 나미와 나이차도 스무살이 나고 전부인과는 별거 상태인 유부남이었다고 한다. 이후 결혼해 두 아들을 두었고, 아들 중 최정철은 가수로 활동하기도 했었다.

나미의 인생에 변곡점에는 늘 음악적 동반자들이 함께 했었다. 해피돌즈 활동부터 프랑코 로마노와의 만남으로 “영원한 친구”로 데뷔했고 1980년대 초반은 키보디스트 김명곤과의 만남은 나미의 날개를 달아줬다. 그의 손에서 나온 “빙글빙글”, “보이네”,“슬픈 인연”은 한국 팝 명작이라고 불러도 좋다. 한국형 신스팝을 장착하고 나온 4집~7집까지는 모두 훌륭한 결과물을 뽑아냈는데 5집의 세련미는 연석원 때문이었다. 연석원 역시 숨은 천재였고 퓨전음악에 개성적인 악곡 전개는 그의 몫이었다. “입술에 묻은 이름”,“사과하나”,“사랑을 느낄 때” 모두 장르의 매력을 드러냈다. 그리고 마지막 앨범 7집은 스튜디오의 숨은 고수 유영선과의 만남으로 “가까이 하고 싶은 그대”는 30년의 시대를 역주행했다. 빼어난 편곡과 시대를 앞서나간 사운드. 레트로의 유행으로 시티팝과 신스팝이 재유행하면서 나미는 재평가를 받고 있고 후배 아티스트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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