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 카나리오스(Los Canarios) Story

1990년대 초반으로 기억되는데 심야 FM방송을 통해 이탈리아 프로그레시브 록밴드 뉴 트롤스(New Trolls)가 소개되면서 큰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당시 음악 좀 듣는 사람 중에 프로그레시브 록 음악은 선택이 아닌 반드시 들어야 할 음악 장르였다. 솔직히 이때 뉴트롤스(New Trolls) 음악에 경도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아트록과 프로그레시브 록 음악은 큰 붐이었다. 때마침 신생 레이블 시완레코드를 통해 다양한 아트록과 프로그레시브 록 앨범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었다. 이 때 발매된 앨범이 전부 좋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이탈리아와 영국과 유럽 쪽의 아트록 음반 중에는 정말 괜찮은 앨범이 있었다. 이때 만난 앨범 중에 스페인 밴드 하나가 비발디(Vivaldi)의 “사계”를 프로그레시브 록으로 재해석한 앨범이 발매됐는데 그게 바로 로스 카나리오스(Los Canarios) <Ciclos>였다. 클래식인 비발디 “사계”를 그대로 록으로 커버해 옮겨 놓은 것이 아닌 메인 컨셉만 따오고 밴드의 상상력으로 채워 놓은 창의적인 앨범이었다. 스페인 프로그레시브 록밴드 로스 카나리오스(Los Canarios) Story.

로스 카나리오스(Los Canarios)는 테디 바티스타(Teddy Bautista)를 중심으로 스페인 카나리아 제도에서 결성됐다. 1964년부터 1974년 해체할 때까지 6장의 정규 앨범과 8장의 싱글 앨범을 발표한 스페인의 소울, 팝록밴드, 프로그레시브 록밴드였다. 초기 앨범 3장까지는 당시 유행했던 말랑말랑한 팝록 음반들을 발표했고 실제로 스페인에서 가장 히트한 곡은 1968년에 발표한 “Get On Your Knees”라는 곡으로 그해 스페인의 여름 노래가 됐다. 초기에는 소울과 리듬앤블루스와 록의 접점을 찾았던 밴드였는데 점점 재즈록 스타일로 진화했고 이후에는 하드록과 프로그레시브 록, 아방가르드한 음악에 근접하는 사운드로까지 이어졌다.

1974년 마지막 앨범에서 두 장짜리 비발디의 ‘사계’를 프로그레시브 록으로 재해석하는 대단한 음악적 성과를 낸다. 이 앨범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EL&P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실제로 멤버들은 이 작품에 고무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비발비 “사계”에 영감을 얻어 인간의 탄생과 유년기, 청년기, 성숙기, 노년기를 각 계절별로 챕터를 나눠서 앨범을 구상해냈다. 1974년 스페인에서 앨범은 발표됐지만 이 앨범으로 끝으로 로스 카나리오스(Los Canarios)는 해체한다. ‘이 앨범에 모든 것을 쏟아낸 것인지? 작업을 하면서 너무 힘들었는지? 이 앨범 이상의 결과물에 대한 고민으로 팀을 해체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 음반으로 스페인 이외의 전 세계 프로그레시브 록이나 아트록 마니아들에게 깊은 각인은 남긴 것은 확실하다.

비발디의 사계 중에 특히 유명한 악장으로 봄 1악장과 가을 1악장은 차임벨이나 대기신호음으로 친숙한 편이고 여름 3악장과 겨울 1악장의 휘몰아치는 부분은 웅장하고 그 속도감에 빠져들게 되는 악장이다. 실제로 로스카나리오스(Los Canarios) 앨범에서도 이 부분을 가장 즐겨 듣는 부분이다. 독창적이고 장엄하게 재현했는데 듣다 보면 다소 화려하고 오싹할 수 있는 대목도 존재하고 멜로트론과 무그 사운드는 지금 들으면 사실 촌스럽게 들리는 부분이 분명 있다. 그럼에도 심포닉 프로그레시브 록과 재즈 록, 아방가르드, 오페라, 멜로디 팝록 등 다양한 스타일이 이 앨범에 골고루 포진하고 있다. 야심차고 때로는 대담하고 약간 과한 느낌도 당연히 있다. 재즈, 블루스, 오페라, 현대 아방가르드 클래식의 요소를 비발디의 원작에 혼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앨범 자켓을 봤을 때는 살짝 기괴하고 무서운 느낌마저 들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불교에서 얘기하는 “열반”이었다. 부처의 가부좌가 연상되고 나비의 날개는 장자가 말한 나비 꿈 ‘호접몽’이 연상됐다. ‘장자가 나비 꿈을 꾸는 것인지? 나비가 장자 꿈을 꾸는 것인가?’라고 생각했는데 타이틀 [Ciclo]를 보는 순간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를 뜻하는 것 같았다. 비발디 사계는 단지 봄여름가을겨울의 풍경에서 받은 인상을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표현했다면 그 바이올린을 기타와 멜로트론으로 대치해서 편곡했다. 아이의 탄생으로 시작되는데 비발디의 사계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끝나지 않고 더욱 확장해 인간의 일생을 계절에 빗대어 표현했고 한 발 더 나가 윤회와 순환을 주제로 한 작품이었다.

첫 번째 막 봄은 소프라노의 비명에 의해 깨지는 사이키델릭한 사운드로 시작한다. 갓 태어난 신생아의 울음소리가 뒤섞여 나오고 비발디의 봄에 해당하는 멜로디가 키보드와 기타 연주로 흘러나온다. 록으로 연주된 바로크 풍은 이색적이고 당황스러움을 전해준다. 두 번째 막 여름은 장엄한 오케스트라 편곡과 합창단 지휘로 시작하여 여름 2악장은 에너지 넘치는 록 스피릿으로 휘몰아친다. 다양한 타악기가 등장하고 오페라와 어쿠스틱 피아노가 등장하는가 하면 블루지한 기타 솔로가 바이올린을 대신하기도 한다.

세 번째 가을 악장은 비발디의 작품이 재즈, 플라멩고, 바로크, 고딕, 록 등 다양한 장르가 뒤섞여 있다. 몽환적인 보이스와 퍼커션, 피아노가 곡의 급격한 전개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그레고리안 성가와 종소리로 크리스마스 캐롤같은 것도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 겨울은 크레센도 형태로 타악기 리듬 섹션과 정신없는 기타로 이어지고 합창단이 등장하며 대혼동의 우주적인 사운드로 대미를 장식한다.

이 앨범은 1974년 당시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곡 구성과 시대를 초월한 작품은 확실하다. 그것도 스페인이라는 유럽의 변방에서 이런 음악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충격적이라는 평이었다. 그럼에도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렸다.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진보적인 작품이라고 치켜세웠지만, 싫어하는 사람들은 난해하고 조악하고 이 앨범 자체가 과대평가 됐다는 의견도 있었다. 90년대 초반 이 앨범을 처음 들었을 때 내 반응도 “이게 뭐야? 비발디 “사계”를 이렇게 난해하게 만들어도 되나?“ 였다. 그리고 좋아했던 악장은 이색적이지만 좋아했었고 나머지는 그냥 기괴하고 음침하고 어수선하기만 했다. 물론 시간이 지나고 다시 들으면 들을수록 묘하게 끌리는 앨범이 됐다는 것이다.

장엄한 멜로트론과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오페라같은 보컬과 휘몰아치는 계절별 악장은 원곡 사계와 확실히 결이 다른 심포니 록오페라같은 앨범이었다. 소프라노와 합창단이 등장하기도 플라멩고 느낌의 기타도 등장하고 멜로트론은 연실 판을 깔아주고 그 위에 각종 악기들이 레이어를 쌓아올려 훌륭한 컨셉트 앨범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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