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 부캐넌(Roy Buchanan) Story

감성 폭발하던 시기에 접한 음악 중 밑도 끝도 없이 빠져들다 그 자체로 경도된 음악들이 종종 있다. 대표적으로 로이 부캐넌(Roy Buchanan)의 “The Messiah Will Come Again”이 그런 예다. 그를 만나기 전에 내가 알던 블루스는 신촌블루스와 게리 무어(Gary Moore), 에릭 클랩튼(Eric Clapton)이 전부였다. 3 King (B.B, Albert, Freddie)은 너무 투박하고 걸쭉하고 와 닿지 않는 정서적 괴리와 편견이 있었다. 에릭 클랩튼(Eric Clapton)도 말랑말랑 귀에 쩍하고 달라붙는 블루스만 듣곤 했다. 당연히 게리 무어(Gary Moore) “Still Got The Blues” 류의 음악을 선호하던 시절에 만난 로이 부캐넌(Roy Buchanan)은 너무나 아득한 존재 같았다. 세상에 이런 음악을, 이런 기타 톤으로 연주하는 사람도 있었어? 한동안 알코올만 들어가면 로이 부캐넌(Roy Buchanan)의 음반을 습관처럼 반복해서 들었다. 기타 소리가 날카롭게 날아와 심장에 박히는 그 느낌이 너무나 좋았고 초절기교가 난무하는 무협지의 한 장면이 연상되는 느낌까지 받았다. 로이 부캐넌(Roy Buchanan) Story.

로이 부캐넌(Roy Buchanan) 혁신적인 연주 스타일과 펜더 텔레캐스터(Fender Telecaster) 기타의 뛰어난 컨트롤로 유명한 미국의 기타리스트이자 블루스 음악가다. 블루스, 록, 컨트리, 재즈를 독특한 스타일로 혼합하여 “세계 최고의 무명 기타리스트”라는 별명을 얻은 텔레캐스터(Telecaster) 사운드의 선구자였다. 독창적이고 자유로우며 슬프고 광기 어린 연주자였지만, 로이 부캐넌(Roy Buchanan)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바로 그 성격이었는데 늘 혼자인 은둔형 외톨이에 가까웠고 굉장히 까칠한 성격이었다. 그의 삶은 방랑과 헤어짐의 연속이었다. 심지어 성공을 원하지 않는다고 종종 인터뷰를 했었다. 

교회에서 처음으로 흑인 음악을 접하며 이때 기타 연주를 시작하는데 기타를 독학으로 익혔다. 부모의 권유에도 강사에게 기타 배우기를 거부하고 어린 시절 3년 동안 귀로만 음악을 듣고 기타를 혼자 쳤다. 그럼에도 그의 기타 실력은 남달랐는데 12살 어린 나이에 로컬밴드에서 눈에 띌 정도의 두각을 드러냈다. 1958년 19살 나이에 시카고의 체스 레코드에서 그의 인생 첫 녹음 데뷔를 하고 이때 데일 호킨스(Dale Hawkins)와 같은 로커빌리 아티스트의 사이드맨으로 프로경력을 쌓아갔다. 데일 호킨스(Dale Hawkins)의 히트곡은 우리에게도 유명한 “Suzie Q”였고 데일 호킨스(Dale Hawkins)와 3년 정도 함께 하며 영광을 누렸다.

그런데 이때 로이 부캐넌(Roy Buchanan)의 실력을 탐낸 데일 호킨스(Dale Hawkins)의 사촌 로니 호킨스(Ronnie Hawkins)가 그를 꼬드긴다. 함께 캐나다 토론토로 넘어가 로니 호킨스와 밴드 활동을 이어갔는데 나름 인기가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재밌게도 이때, 로니 호킨스 밴드에서 베이스를 연주했던 막내가 한 명 있었는데 후에 유명 뮤지션이 된다. 미국 컨츄리록의 선구자 더 밴드(The Band)의 기타리스트 로비 로버트슨(Robbie Robertson)었고, 로니 호킨스(Ronnie Hawkins)밴드의 인기도 높았지만 로이 부캐넌(Roy Buchanan)은 베이스 치던 로비 로버트슨(Robbie Robertson)에게 기타를 가르쳐주고 팀의 기타 자리를 물려주고 밴드를 떠나 한동안 방황한다. 

1961년 결혼을 하고 워싱턴 DC로 이주한 로이 부캐넌(Roy Buchanan)은 로컬밴드 기타리스트로 동네에서 실력을 얻기는 했지만, 음악으로 먹고 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가족이 생기고 로이 부캐넌(Roy Buchanan)은 음악 산업을 떠나 특이하게 다른 직업을 선택한다. 손놀림이 남달라서였는지 그가 선택한 직업은 이발사였다.

최고의 기타 실력의 핑거링으로 이발을 해야 하는 현실을 동료들은 안타까워했고 동료 뮤지션들이 그를 찾아왔다. 에릭 클랩튼(Eric Clapton)과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의 키스 리처드(Keith Richards)와 론 우드(Ron Wood)였다. 1969년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를 만든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존스(Brian Jones)가 사망한다. 키스 리차드는 공석이 된 브라이언의 빈자리를 로이 부캐넌에게 제안했지만 로이 부캐넌은 단번에 이 제안을 거절한다. 아마도 당대 최고의 밴드 롤링 스톤즈의 제안을 거절한 유일한 뮤지션이 로이 부캐넌 일 것이다. 이때 붙은 별명이 “롤링스톤즈를 거절한 남자”였다.

워싱턴 D.C. 지역에 정착했던 이 시기에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핀치 하모닉스’라는 독특한 기타톤의 사운드를 개발한다. 앰프를 통해 볼륨과 톤을 풀로 올린 상태로 텔레캐스터(Telecaster)를 연주했고, 기타의 볼륨과 톤 컨트롤을 사용하여 볼륨과 사운드를 제어했는데 이를 통해 패달 없이 와와 이펙트 효과를 얻었다. 특이하게도 로이 부캐넌(Roy Buchanan)은 이펙트 페달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가끔 필요에 따라 중기에는 에코 패달이나 후기에는 딜레이 패달을 사용하기는 했다. 로이 부캐넌의 날카롭게 찌르는 기타톤은 일명 치킨 피킹이라고 불렀는데 피크로 피킹도 하면서 오른손 다른 손가락으로 핑거피킹을 같이 활용하는 일종의 하이브리드 피킹법이었다.

이를 통해 로이부캐넌만의 독특한 기타톤과 테크닉이 탄생했는데 기타 잡지 Guitar Player에서 그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색 50개” 중 하나로 뽑기도 했다. 그는 결코 스타덤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매우 영향력 있는 기타 연주자였고 일렉기타의 한계를 넓혔다는 평가와 가장 어두운 블루스부터 신음하는 R&B, 깨끗하고 간결한 음색에 이르기까지 그의 미묘한 톤과 테크닉은 기타리스트의 기타리스트라는 극찬이 뒤따랐다.  

1971년 미국 공영방송인 PBS는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로이 부캐넌(Roy Buchanan)을 소개한다. 이 프로그램 이후 그의 수식어가 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무명 기타리스트”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그에 대한 반향은 대단했다. 그의 독특하고 화려한 기타 연주의 많은 이들이 사로잡혔고 더 이상 밴드의 사이드맨이자 밴드 멤버일 필요가 없었졌다. 로이 부캐넌 자신의 이름과 연주만으로도 전설이 되기 충분했다.

드디어 1972년 자신의 이름을 내건 앨범이 세상에 나온다. 그의 시그니쳐송 기타고해성사라고 불리는 명곡 “The Messiah Will Come Again”이 담겨있는 앨범이었다. 이후 그의 솔로 활동은 성공가도를 달리며 더 이상 무명 기타리스트도 비운의 기타리스트도 아니었다. 

이 다큐멘터리의 방영과 솔로앨범으로 영향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대적으로 무명임에도 불구하고 로이 부캐넌(Roy Buchanan)의 영향력은 매우 커졌다. 단적으로 제프벡(Jeff Beck)은 <Blow by Blow> 앨범에서 그에게 헌정의 의미로 노래를 한 곡 바친다. 기타가 바이올린처럼 울어대는 명곡 “Cause We’ve Ended As Lovers”는 그렇게 만들어진 곡이었다.

기타리스트의 기타리스트라 소개되면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는데 대표적으로 제프벡(Jeff Beck), 더 밴드의 로비 로버트슨(Robbie Robertson), 핑크 플로이드의 데이빗 길무어(David Gilmour), 제리 가르시아(Jerry Garcia),  닐영 밴드의 닐스 로프그렌 (Nils Lofgren), 특히  게리 무어(Gary Moore)는 그의 기타톤을 너무 사랑했고 “The Messiah Will Come Again”을 리메이크해 자신의 앨범에 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로이부캐넌(Roy Buchanan)버전을 훨씬 더 선호한다. 

하지만 그 영광의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알코올 중독이 문제였는데 까칠한 그의 성격에 술이 더해지면 문제가 터져 나왔다. 기타리스트로 유명해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그의 성향과 동시에 상업적인 성공을 강요하는 레코드사의 압력과 불화를 빚고 있었는데 1981년 알코올 중독과 음반사와의 갈등으로 잠시 공백을 가졌다. 하지만 1985년 그래미에 노미네이트되는 등 로이 부캐넌(Roy Buchanan)은 활동을 이어갔다. 밖에서 보기에 큰 문제는 없어 보였지만 내재된 공격성은 술을 마시면 밖으로 터져 나왔다. 

1988년 8월 14일 밤 10시 페어팩스 경찰서에 신고가 접수된다. 루이 부캐넌(Roy Buchanan)이 집에서 부부싸움을 하고 있다는 전화였고 술에 취해 아내를 때리고 집 밖으로 나갔는데 집에서 몇 블록 떨어진 곳에서 공공장소 주취 혐의로 체포된다. 1시간 만에 기소되어서 교도소에 수감되고 밤 11시 경찰은 가벼운 즉결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알려주고 자리를 뜬 사이 감옥에서 자신의 셔츠에 목을 맨 채 발견된다. 현장에서 심폐소생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응급센터로 이송된 후 그날을 넘기지 못하고 11시 59분 사망 선고를 받는다.

1988년 그의 나이 48세 나이였고 그의 사망 원인은 공식적으로 자살로 기록되었으며, 그의 친구와 가족은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그의 죽음은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사망한 시신의 후두부가 손상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이 부캐넌(Roy Buchanan)이 사망한 그 주 금요일에 쟈니 윈터(Johnny Winter)와의 합동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전설적인 두 뮤지션의 합동공연은 그렇게 비극적으로 무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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