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영화를 보다 주인공에 감정 이입되는 순간들이 있다. 심지어 한발 더 나아가 이 영화 속의 이야기가 마치 내 얘기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영화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가 딱 그런 얘기였다. 주인공 존 쿠삭(John Cusack)은 시카고에서 레코드매장 ‘챔피온 바이닐’ Championship Vinyl 을 운영하는 30대의 노총각인데 이 설정에 감정 이입됐다. 실제로 20대 초반부터 꽤 오랜 기간 레코드점에서 일했었고 한때 꿈이 존 쿠삭같은 레코드매장 사장이 내 어린 시절의 꿈이었다. 이 영화에 얼마나 빠졌냐면 한동안 인터넷 대화명이나 별칭을 ‘추니쿠삭’이라고 쓸 정도였다. 그리고 살 빠졌을 때는 존 쿠삭 닮았다고 사람들에게 우기고 다니는 만행을 저질렀었다.
원작소설을 영화로 그런데 제목은 왜 이래? Vinyl 영화
영화는 2000년에 개봉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다. 원작 소설이 따로 있는데 1995년 영국의 음악평론가인 닉 혼비(Nick Hornby)의 자전적인 소설을 원작으로 하며 원래 제목은 하이 피델리티(High Fidelity)다. 오디오 용어로 흔히 얘기하는 하이파이(Hi-Fi) 고음질의 그 하이파이가 제목이다. 사람이 들을 수 있는 가청주파수 20Hz~20Khz를 원음에 충실하게 왜곡 없이 재생하는 음향기기의 특성을 말한다. 예전 Vinyl LP판 쟈켓에 High Fidelity라고 적혀 있는 문구는 자주 볼 수 있다.
그런데 국내 개봉하면서 제목을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같은 말도 안 되는 제목을 붙여 놨다. 원제와는 아무 상관없지만, 영화 내용을 유추하기에는 국내 개봉 제목만큼은 확실하지만 뭔가 아쉬운 대목이 있다. 아마도 당시 이런 비슷한 제목들이 마치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었는데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류의 제목들이 붙었던 영화였다.
제목으로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가 직관적이지만, 원작이 가진 의미와 중의적인 표현은 무뎌진 면이 있다. 하이 피델리티(High Fidelity)는 대놓고 오디오와 음악영화임을 드러내는 제목이자 사람들은 모든 대역폭의 주파수를 잘 듣듯이 사랑도 전대역에 걸쳐서 경청해야 한다는 중의적인 표현을 놓친 것 같아 조금은 아쉬운 대목이다.
영화 시눕시스
레코드점을 운영하는 롭 고든(존쿠삭)은 음악 골수 마니아답게 그 어떤 상황에서도 강박적으로 Top 5 플레이리스트를 만드는 습관이 있다. 예를 들면 슬플 때 듣는 노래 Top 5, 비 오는 날 듣는 노래 Top 5, 이별하고 듣는 노래 Top 5 같은 식이다. 레코드점에서 같이 일하고 있는 괴짜들 베리(잭 블랙)와 딕(토드 루이소)도 매니악한 비슷한 성향의 캐릭터다. 각종 노래와 제목 그 뒷이야기까지 줄줄 꿰고 다닌다. 한마디로 걸어 다니는 음악백과사전 같은 이들이다. 다들 자기 일을 사랑하며 순탄하게 좋아하는 일을 하며 잘살고 있다.
심지어 주인공 롭은 예쁜 변호사 여자 친구 로라까지 곁에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 친구 로라가 결별을 선언하고 그를 떠난다. 주인공은 갑작스레 이별 통보에 멘붕에 빠지고 지금까지 매번 차이기만 했던 이유를 알기 위해 과거의 애인들을 찾아다닌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의역한 제목이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가 된 것이다. 이 영화는 한마디로 “애인에게 차인 찌질남의 사랑방정식 정답 찾기” 정도다.
모든 로맨틱 코미디는 이미 답이 정해져 있듯이 이 영화의 엔딩도 충분히 예측가능하다. 사실 갑작스러운 이별의 이유는 당연히 멍청한 남자 주인공의 문제였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 예전 여자 친구들을 찾아 나서면서 서서히 그 이유를 알게 되고 변화한다는 뻔한 로맨틱 코미디다. 사실 이 영화의 감상 포인트는 줄거리가 아니다. 바로 출연한 모든 주-조연의 생생한 캐릭터와 영화 전반에 흐르는 음악이다. 로맨틱 코미디의 탈을 쓴 음악들에 있다. 매니악한 음악들이 주인공이고 줄거리는 단지 거들뿐이다.
Vinyl 리스너를 위한 음악영화 그리고 사운드트랙
주인공 롭(존쿠삭)이 운영하는 레코드점은 대형 음반 가게와는 확연히 다르다. 다분히 매니악한 취향의 음반 가게로 대중성은 이미 내다 버렸다. 극 중에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의 노래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이 음반을 선물하기 위해 중년 남자가 바이닐(Vinyl)을 사려고 와서 음반을 찾자 베리(잭 블랙)은 그 남자를 내쫓아 버린다. 이 레코드점(마니아의 성지)에 방문하는 손님의 의사와 무관하게 자신들이 생각하는 추천 음반을 강요하는 지경에 이른다.
OST도 마찬가지다 각종 차트에서 좋은 판매량과 차트 성적과는 거리가 멀다. 가수들의 히트곡이나 타이틀곡이 아닌 B-Side에 수록되어 있을 것 같은 노래들, 나만 아는 명곡이라 불리기 딱 좋은 노래들이 대거 등장한다. OST 목록만 봐도 유명가수들이 대거 포진해 있지만 알려진 트랙들은 몇 곡 없다.
알려지지 않은 노래지만 들으면 누구나 반할 것 같은 노래들이 차고 넘친다. 킹크스(Kinks), 벨벳 언더그라운드(Velvet Underground), 러브(Love), 밥 딜런(Bob Dylan),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의 노래가 흘러나오지만, 노래들은 생소하기만 하다. 그중에 벨벳 언더그라운드 노래를 좋아했다.
이 사운드 트랙중에 보석처럼 찾아낸 곡이 하나 있는데 스테레오렙(Stereolab)의 “Lo Boob Oscillator”라는 곡이다. 1990년대 런던에서 결성된 밴드로 약간 특이한 느낌이다. 영국밴드임에도 영어와 불어로 번갈아 부르는 여성보컬, 신비한 느낌의 정치적이며 철학적 가사를 지녔다고 한다. 음악장르적인 측면에서도 다양한 장르를 혼합해서 들려줬다. 펑크, 재즈, 브라질 음악등 어떤 범주에 넣기에도 음악들이 다양한 편이다. 이 OST에서는 “Lo Boob Oscillator”가 수록되어 있다.
그나마 가장 대중적인 노래가 한 곡 실렸는데 마빈 게이(Marvin Gaye)의 “Let’s Get It On”을 극 중 배리인 잭 블랙(Jack Black)이 영화 속에서 부른 버전이 실려 있는 정도다. 이 곡은 어쩌면 이 영화의 실질적인 주제곡이나 다름없다. 잭 블랙은 영화 스쿨어브록(School Of Rock)에서도 멋진 음악선생 역을 하기도 했었고 실제로 록밴드 활동을 하는 뮤지션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음악영화답게 음악에 대한 고민과 고심의 흔적이 잘 드러난다. 실제로 극중 롭(존쿠삭)의 캐릭터 구축을 위해 시나리오 작가들의 최대 과제는 영화의 어느 장면에 어떤 곡을 사용할지를 두고 거의 2,000곡의 노래를 듣고 그중에 70개의 노래를 큐레이팅했다. 그중에 감독과 상의 끝에 최종 낙점된 노래가 30곡 정도였고 그중에 사운드트랙에 수록된 노래가 15곡이다.
참으로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이 흘러나온다. 시대와 장르를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OST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 브루스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 스코틀랜드 인디밴드 벨앤세바스찬(Belle & Sebastian)노래도 흘러나온다. 함량 뛰어난 팝음악들이 골고루 쓰이고 있다.
음악 감상이 취미이고 거기에 매니악한 취향에 LP 바이닐(Vinyl)을 수집하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는 100%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낄 것이다. 이 영화는 대중음악이 리스너에게 어떻게 ‘자기 얘기’로 스며드는지 잘 보여준다. 때로는 노래 가사가 시가 되고 인생의 좌우명이 되어 그 음악을 사랑하게 되는 리스너들의 찬가이자 리스너들을 위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