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도 치콜리니(Aldo Ciccolini) : Liszt

클래식음반을 가끔씩 사는 편인데 이건 선견지명 먼 미래를 내다본 포석이다. 사람의 취향은 꾸준히 변한다. 그때는 좋았지만 시간이 흘러 유치해 지고 질리는 음악도 있고, 그때는 별로였지만 나중에 좋아지는 음악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클래식 음악도 그렇다. 예전에는 유명한 작곡가와 연주자의 알려진 레파토리를 선호하는 편이었다. 취향의 변화와 추이를 보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클래식음반을 듣는 횟수가 예전에 비해 늘어나고 좋은 음반은 꾸준히 곡간에 겨울준비를 위해 곡물을 쌓아놓듯 명반이라 불리는 음반들을 쟁여놓기 시작했다. 그중에 눈에 띄는 연주자 알도 치콜리니(Aldo Ciccolini) 음반 하나를 꺼내본다. 

알도 치콜리니(Aldo Coccolini : 1925-2015)는 드뷔시(Debussy), 라벨(Ravel), 사티(Satie)와 같은 프랑스 작곡가의 곡 해석력이 뛰어난 것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태생의 프랑스 클래식 피아니스트다.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태어나 9살에 피아노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나중에 나폴리 음악원의 교수가 됐다. 1949년 파리에서 열린 마그리트 롱자크 티보 콩쿠르에서 우승한 뒤 프랑스로 이주해 1971년 프랑스 시민이 됐다.

알도 치콜리니(Aldo Ciccolini)는 세련된 서정성, 진주 같은 음색, 민첩한 손가락으로 유명했다. 그는 잘 알려진 프랑스 작곡가 레퍼토리 외에도 데오다 드 세베락(Déodat de Séverac), 쥘 마스네(Jules Massenet), 알렉시스 드 까스티용(Alexis de Castillon)과 같은 덜 알려진 프랑스 작곡가들의 작품을 녹음하며 이런 무시된 레퍼토리에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도움이 됐다. 그는 또한 리스트(Liszt)뿐만 아니라 알베니즈(Albéniz), 그라나도스(Granados), 데 파야(de Falla)와 같은 스페인 작곡가들의 해석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1970년부터 1988년까지 프랑스 파리 음악원에서 아르투르 피사로(Artur Pizarro), 쟝-이브 띠보데(Jean-Yves Thibaudet), 니콜라스 안젤리치(Nicholas Angelich)를 포함한 수많은 학생들과 가르쳤다. 알도 치콜리니(Aldo Ciccolini)는 1999년 독주회를 통해 프랑스 공연 50주년을 기념했으며 2002년 야나체크(Janáček)과 슈만(Schumann) 녹음으로 디아파송도르(Diapason d’Or)를 수상했습니다. 그는 2015년 89세의 나이로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했다.

알도 치콜리니(Aldo Ciccolini)는 모차르트(Mozart), 베토벤(Beethoven), 드뷔시(Debussy) 및 사티(Satie)의 피아노 솔로 작품 전체를 포함해 EMI 및 기타 레이블을 위해 100개 이상의 획기적인 녹음을 했고 그중에 가장 유명한 연주는 단연 에릭 사티(Erik Satie)의 피아노 솔로 전곡녹음이었다.

심지어 사티(Satie) 연주에 있어서는 독보적이었는데 다른 연주자가 선뜩 떠오르지 않을 만큼 알도 치콜리니(Aldo Ciccolini) 연주는 최고다. 꾸밈없는 순수함과 사려 깊은 프레이징으로 유명하고 거의 레퍼런스 녹음으로 인정받고 있고 다른 피아니스트들이 치콜리니의 연주를 벤치마크해서 녹음하는 경우가 많다. 사티(Satie)연주의 정석같은 느낌이다. 

또, 클로드 드뷔시(Claude Debussy)의 피아노 전곡 녹음은 매혹적인 단순함, 생동감 넘치는 하모니, 절묘한 음색 그레이딩으로 호평을 받았으며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녹음은 서정성과 세련된 음색을 돋보이게 했다.

2010년에 EMI는 알도 치콜리니(Aldo Ciccolini)의 1950년부터 1991년까지의 전체 녹음으로 구성된 56CD 박스 세트를 출시했다. 그의 다작에 대한 증거가 확실하다. 

– 진주처럼 반투명한 톤과 민첩한 핑거워크 : 치콜리니는 절묘한 톤 컨트롤과 민첩한 테크닉을 통해 가장 미묘한 뉘앙스까지 끌어낸다는 평이 늘 뒤따랐다.

– 감정적 절제와 세련되고 절제된 표현, 치콜리니는 화려한 허세보다는 겸손한 무대 태도와 감정적 절제를 선호하는 편이었다. 어떤 평론가는 그의 연주에는 “영향을 받지 않은 무능함”과 “매혹적인 단순함”이 있었다고 평했다. 

– 역동성과 색상의 극미한 음영 : 볼륨과 음색의 가장 미세한 그라데이션을 찾아 놀라운 음색 색상을 달성했다. 한 비평가가 썼듯이 그는 피아노 소리를 “타악기가 아닌 수많은 뉘앙스와 억양을 지닌 인간의 목소리”로 만들었다고 평했다. 

– 생생한 하모니와 무지개 빛깔의 음색 : 그의 손길은 드뷔시의 피아노 음악과 같은 작품에서 반짝이는 하모니와 무지개 빛깔의 특성을 이끌어 냈다.

알도 치콜리니(Aldo Ciccolini)가 연주할 때 집중력은 상당한 편이었다. 모든 피아니스트가 연주시 그렇게 집중하지만 치콜리니는 피아노에 녹아들어 음악에 완전히 몰입한 것처럼 느껴진다.  요약하자면, 치콜리니의 연주는 그의 겸손한 성격과 깊은 음악적 통찰력을 반영하여, 노골적인 기교나 쇼맨십보다 시적인 서정성, 음색의 세련미, 미묘한 표현의 뉘앙스를 우선시하는 편이다. 

리스트(Liszt)의 “Harmonies poétiques et religieuses(시적 및 종교적 조화), S.173”는 프란츠 리스트가 1847년 그의 후원자이자 필생의 여인 카롤리네 본 자인-비트겐슈타인(Carolyne von Sayn-Wittgenstein) 공작부인을 위해 작곡한 10개의 피아노곡으로 구성된 전집이다. 이 작품은  그레고리오 성가를 기반으로 한 짧고 단순한 작품으로 리스트(Liszt)의 다른 주요 피아노 작품 사이클에 비해 난이도는 평균적으로 약간 더 쉬운 편이었다.

1847년 2월, 리스트는 당시 러시아 제국의 영토였던 키예프에서 일종의 자선공연을 했는데, 이 연주회에서 이후 리스트 필생의 여인이 된 카롤리네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이 공작부인은 정략결혼을 한 탓에 남편에게 별 애정이 없었다. 게다가 자신의 명의로 러시아 제국령 우크라이나 영토에 많은 영지를 상속받은 탓에 경제적으로도 남편으로부터 독립한 상태였고 딸 하나만 낳은 후 줄곧 남편과 별거 중이었다. 돈 걱정은 없었지만 외롭게 살고 있던 그녀의 동네에 온 유럽을 들끓게 한 마력의 남자 리스트가 나타난 것이다. 

조용하고 배려심이 깊은 여성이었으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는데, 특히 그녀의 독실한 신앙심은 만만찮게 신앙에 심취해 있던 리스트와 정말 잘 맞았다. 두 사람은 급격하게 가까와졌고, 이 시점에서 공작부인은 리스트 인생의 전환점이 될 중요한 제안을 하게 되는데, “그간 연주자로서 명성도 충분히 얻었고 나이도 들었으니 이제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작곡과 후학양성에 전념하는게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 떠돌이 생활을 끝내고 자신과 함께 정착해서 살자는 것이었다. 리스트는 고민 끝에 이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결국 로마 교황청의 반대로 파국을 맞이한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공작부인은 공식 남편과의 혼인을 무효화해야 리스트와 결혼을 할 수 있었다. 집안의 정략결혼으로 원치 않은 결혼을 강요받았다고 지속적으로 교황청에 탄원과 로비를 했지만 러시아 제국의 방해로 혼인무효 불가라는 결론에 이르며 결국 리스트와의 결혼은 이뤄지지 않았다. 리스트는 이후 잠시 성직자의 길을 걷기도 한다. 

알도 치콜리니(Aldo Ciccolini)는 리스트(Liszt) 작품 해석에 있어서도 탁월한 편이었다. 이 녹음은 치콜리니의 뛰어난 예술성과 리스트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주며, 놀라운 감성과 기교로 이 작곡의 시적이고 영적인 본질을 잘 포착해서 연주했다는 평을 들었다. 실제로 치콜리니는 85세의 나이에 “Harmonies Poétiques et Religieuses” 독주회를 열기도 했는데 나이와 상관없이 지속적인으로 피아노 숙달을 입증하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해석으로 호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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