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기타 : Wes Montgomery

가끔 음악인 중에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이 있다. 원래 직업은 용접공으로 결혼해서 잘 살다가 기타라는 악기에 꽂혀 뒤늦게 독학으로 익혀 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긴 경우다. 아니 무협지나 무협 영화에나 나올법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이런 경우가 종종 있다. 정식 음악교육도 받지 못해 악보도 볼 줄 몰랐지만 오로지 듣고 따라 하다 자신의 스타일을 구축한 경우다. 물론 피나는 독학의 노력과 연습이라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과정을 겪었을 테지만 그럼에도 성취해 일궈낸 결과물들은 누가 봐도 재능은 타고났다고 봐야겠다. 재즈 기타 웨스 몽고메리(Wes Montgomery)의 이야기다. 

1923년생으로 미국의 재즈기타리스트다. 가족은 많았고 부모는 어릴 때 이미 이혼해 형제들과 아버지를 따라 오하이오주에서 학창시절을 보낸다. 1943년 20살의 나이에 용접공 일을 구하고 결혼해서 잘 살았는데 어느 날 아내와 춤을 추다가 처음으로 챨리 크리스찬(Charlie Christian)의 음반을 듣고는 단박에 꽂혀버렸다. 챨리 크리스찬은 재즈 초기의 스윙시대의 재즈 기타리스트로 최초의 일렉트릭 기타리스트 중에 한명이었다. 웨스 몽고메리는 다음날 바로 악기점으로 달려가 기타를 구입한다. 그리고 1년 동안 밤낮으로 찰리 크리스찬을 본받아 독학으로 기타를 연습하는데, 문제는 정식으로 음악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 악보를 볼 줄도 몰랐다. 더군다나 기타를 돈 주고 구입했으니 어떻게든 연주 정도는 해야겠다는 의무감만 있었고 음악가가 될 생각도 없었다. 

그러다 낮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지역의 작은 클럽에서 찰리 크리스찬의 연습한 솔로곡들을 따라하며 무대에 몇 차례 올라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뜻밖의 행운이 찾아온다. 1948년 꽤 유명한 빅밴드 리더 라이오네 햄튼(Lionel Hampton) 밴드가 웨스 몽고메리가 사는 지역에 투어 중이었는데 기타리스트를 찾고 있었다. 찰리 크리스찬 느낌의 웨스 몽고메리의 기타 연주를 듣고는 바로 고용했다. 라이오네 햄튼 밴드에서 거의 2년을 보냈다. 

이때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웨스 몽고메리가 비행기 공포증이 있어 비행기를 탈 수 없었다고 한다. 땅덩어리가 넓은 미국에서 밴드 멤버들은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는데 웨스 몽고메리는 도시에서 도시로 직접 운전해서 이동했다. 밴드 동료들은 이런 그의 체력을 굉장히 놀라워했다. 직접 운전해서 클럽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집에 있는 아내와 가족들에게 전화를 거는 일이었다. 

라이오넬 햄튼 밴드에서 2년동안 밴드 생활을 하다 가족이 있는 인디애나폴리스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역의 클럽에서 에디 히긴스 트리오(Eddie Higgins Trio), 로저 존스 퀸텟(Roger Jones Quintet)에서 공연을 재개했다. 이 당시 굉장히 바쁜 나날을 보낸다. 웨스 몽고메리는 아내와 일곱 자녀를 부양하기 위해 낮에는 용접공으로 일했고, 밤에는 두 개의 클럽에서 아침까지 공연했다. 종종 블랙아웃을 겪기도 했었다고 한다. 

이렇게 치열하게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연을 뛸 때 한 공연장에서 그의 기타 연주를 인상 깊게 들은 청중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하드밥 시대 색소폰주자 캐논볼 어들리(Cannonball Adderley)였다. 캐놀볼 어들리는 웨스 몽고메리를 리버사이드(Riverside) 레이블에 소개를 하고 그를 영입시킨다.

이때부터 앨범 레코딩도 하고 각종 재즈앨범에 참여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1959년 드디어 음악가로 활동한 후 첫 리더로서 첫 번째 앨범을 발표한다. 이시기에 자신의 이름을 단 앨범들이 꾸준히 발매되어 나오고 1960년대부터는 각종 재즈 페스티벌과 클럽 공연에서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 등과 협연하며 거장 반열에 올라서게 된다. 

리버사이드에서 발표된 첫 번째 앨범은 웨스 몽고메리 트리오 앨범이었다. 1963년까지 리버사이드 레코드에서 총 10장의 웨스의 이름을 단 앨범을 발표하고 다양한 재즈 세션 녹음을 마친 후, 재즈 레이블의 명가 버브(Verve)로 레이블을 옮긴다. 이 버브 레이블에서 기타리스트의 남은 생애 동안 함께 하게 될 세계적인 프로듀서 크리드 테일러(Creed Taylor)를 만나게 된다.

실질적으로 버브 시절부터 웨스 몽고메리는 조금 더 대중적으로 알려지고 팝적인 재즈앨범들이 쏟아져 나온다. “California Dreamin’”,“Tequila”,“Goin’ Out Of My Head”가 대표적이다.

버브 이후의 행보는 일반적인 재즈 레이블이 아닌 더 대중적인 레이블 A&M 레이블로 옮겨서 앨범을 발표한다. 프로듀서는 역시 크리드 테일러(Creed Taylor)였다. 이로써 크리드 테일러는 웨스 몽고메리의 10장의 앨범 프로듀서로 함께 한다. 이 중에 8장은 아예 팝 시장을 겨냥한 앨범들이었고 대중들은 좋아했지만 재즈팬들에게 큰 실망감을 주기도 했다. 

이 당시 TV 출연은 물론 인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였는데 안타깝게도 1968년 6월 자택에서 향년 45세의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끊임없이 변화하던 재즈의 역사 중에 악기로서 기타의 위상이 갑자기 올라간 시기가 있었다. 비밥과 함께 모던재즈가 시작된 이후 기타는 재즈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바로 일렉트릭 기타의 활용과 앰프의 증폭이 가능해지면서 재즈 장르 안에서 기타는 새로운 가능성과 변곡점을 맞이한다. 

그 첫 번째가 찰리 크리스찬이고 그를 잇는 기타리스트가 바로 웨스 몽고메리였다. 탄탄한 비밥라인과 즉흥연주 거기에 옥타브 주법과 같이 악기의 단점을 보완하면서 개성을 더하는 다양한 테크닉을 개발한 것이 바로 웨스 몽고메리다. 

특히 웨스몽고메리가 만들어낸 엄지 피킹은 우연히 연마된 기술이다. 낮에 공장 일을 마치고 야밤에 기타연습을 해야 했던 상황에서 가족들을 깨우지 않고 기타연습을 하기 위해 고안한 방법이 바로 엄지 피킹이었고 이는 되려 기타의 톤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효과를 낳게 된다. 이 엄지 피킹주법은 실제로 습득하기 매우 어려운 주법 중에 하나다. 단순히 다운 피킹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업 피킹도 동시에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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