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미 볼린(Tommy Bolin) Story

89년 즈음 프랑스 여배우 소피 마르소가 국내 CF에 등장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드봉 화장품 광고로 기억되는데 그 광고에 꽂힌 건 소피 마르소도 아니고 바로 광고음악이었다. 굉장히 이국적인 사운드의 노래로 토미 볼린(Tommy Bolin)의 “Savannah Woman”이었다. 소피 마르소가 마지막에 불어 원어로 “드~봉~”이라는 멘트도 잊지 않고 열심히 예쁨을 뽐내며 광고를 찍었지만, 화면 가득 분위기를 만든 건 바로 토미 볼린(Tommy Bolin)의 음악이었다. 정말 멋진 선곡이 예술이었고 그 음악을 테이프로 구입해 들었는데 나머지 곡들은 하드록 음악들이었고 그 테이프에서 들었던 노래는 “Savannah Woman”만 주구장창 들었었다. 그렇게 토미 볼린(Tommy Bolin)을 만났다.

당시 90년대에는 음악사에서 공테이프에 녹음도 해줬는데, 듣고 싶은 노래를 적어주면 순서대로 녹음을 해줬었다. 그런데 가끔 없는 노래는 사장님의 추천곡이 대신 자리하기도 했었다. 이때 마지막 트랙에 수록되어 있었던 노래 한 곡이 바로 토미 볼린(Tommy Bolin) 2집에 있었던 “Hello Again”이란 곡이었다. 중학생에게 토미 볼린(Tommy Bolin)은 인연처럼 다가왔고, 20대 가장 좋아했던 물론 지금은 더 좋아하는 기타리스트가 됐다.

안타깝게 일찍 세상을 떠난 천재 뮤지션의 음악은 더 이상 듣지 못하는 아쉬움에 더 많이 그립고 더 좋게 들리는 것 같다. 토미 볼린(Tommy Bolin) 역시 살아있었다면 제프 벡(Jeff Beck)이나 에릭 클랩튼(Eric Clapton)같은 기타장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분명 팝 음악사에 많은 영향을 남겼을 거라 확신한다. 불과 10년 정도밖에 안 되는 경력임에도 상당한 족적을 남긴 것을 보면 더 그렇다.

1951년 미국 아이오와 수시티에서 스웨덴계 부친과 시리아계 모친 사이에서 태어났다. 1964년 13살부터 밴드에 합류해 연주를 시작했는데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와 같은 록앤롤 스타를 보며 가수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처음에는 드럼과 피아노를 배우다 11살 때 기타를 독학으로 연주하기 시작했는데 로컬밴드에서 연주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토미 볼린(Tommy Bolin)은 1951년생이고 사망한 해는 1976년이니 약 25살 정도의 아주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세상에 남긴 첫 번째 앨범이 1969년의 제퍼(Zephyr) 시기에 냈으니 실질적 우리가 정규음반 기록을 통해서 토미 볼린(Tommy Bolin)을 느낄 수 있는 시기는 고작 8년 정도 뿐이다.

십대 후반이던 1960년대 말 결성한 제퍼(Zephyr)에서 토미 볼린(Tommy Bolin)은 인상적인 기타 연주와 실력을 보여줬지만, 밴드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 재니스 조플린(Janis Joplin)을 연상시키는 여성 보컬 캔디 기븐스(Candy Givens)를 내세운 밴드 제퍼(Zephyr)에서 두 장의 앨범은 남겼는데 두 장 모두 좋은 평을 들었지만 토미 볼린(Tommy Bolin)은 이 팀을 탈퇴한다.

그리고 당시 유행하던 재즈록 성향의 음악을 하는 에너지(Energy)란 밴드를 결성하고 의욕적으로 활발한 라이브 활동을 펼쳤지만 레코딩 계약은 실패했고 앨범까지 발표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토미 볼린(Tommy Bolin)의 뛰어난 기타 실력에 대한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토미 볼린(Tommy Bolin) 사후 이 시기에 녹음했던 곡들이 공개됐는데 하드록에 조금은 프로그레시브한 구성의 음악들이었고 역시 멋진 기타연주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밴드 에너지(Energy)는 그렇게 접게되고 제퍼(Zephyr)시절 동료 캔디 기브스(Candy Gives)와 잠시 재회하지만 거의 1년 동안 음악 활동을 중단했다. 그렇다고 헛으로 보낸 것이 아닌 이 시절 백수로 지내면서도 블루스 거장 앨버트 킹(Albert King)을 1년간 따라다니며 블루스기타를 연마했으며 재즈록과 글램록에 꽂혀있었고 거의 100곡에 가까운 노래를 썼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시기부터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토미 볼린(Tommy Bolin)이 추구하고 싶었던 음악적 방향과 다르게 은행계좌는 바닥인 상태에서 다른 밴드에 가입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1973년 밴드 제임스 갱(James Gang)에 합류하게 된다. 제임스 갱(James Gang)의 초대 기타리스트는 이글스(Eagles)의 기타리스트로 유명한 조 월시(Joe Walsh)였다. 조 월시(Joe Walsh) 후임으로 도미니크 트로이아노(Domenic Troiano)가 제임스 갱(James Gang)에 있었지만 도미니크가 밴드 게스 후(Guess Who)에 합류하면서 후임을 찾고 있었다. 이때 토미 볼린(Tommy Bolin)을 추천한 것이 바로 조 월시(Joe Walsh)였다. 1973년 <Bang>과 1974년 <Miami> 두 장의 앨범을 녹음했는데 두 앨범의 “Bang”한 곡을 빼고는 거의 모든 곡을 작사하거나 공동 작곡했다. <Bang> 앨범에서 “Alexis”,“Mystery” 두 곡을 좋아했다.

에너지(Energy) 활동과 제임스 갱(James Gang) 앨범 사이 1973년 재즈록(퓨전재즈) 그룹 마하비시누 오케스트라(Mahavishnu Orchestra)의 드러머 빌리 코브햄(Billy Cobham)이 토미 볼린을 솔로앨범 작업에 초빙한다. 빌리 코브햄(Billy Cobham) 솔로 데뷔 앨범 <Spectrum>의 녹음을 위해 고심하던 중 밴드 멤버인 건반주자 얀 해머(Jan Hammer)가 토미 볼린(Tommy Bolin)을 적극 추천해서 이뤄진 만남이었고 이 앨범에서 “Quadrant Four”,“Stratus”,“Red Baron”에서 섬세하고 재기 넘치는 거침없는 기타 연주를 들려주는데 토미 볼린의 기타연주는 록 기타계의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앨범을 듣고 감명받은 제프 벡(Jeff Beck)은 <Blow By Blow>, <Wired>를 녹음하기에 이른다.

빌리 코브햄(Billy Cobham)과의 앨범을 녹음하고 다음해 1974년 제임스 갱(James Gang) <Miami>앨범까지 발표하며 꾸준히 라이브도 뛰었지만 점점 제임스 갱(James Gang) 활동에 흥미를 잃어가더니 앨범투어가 끝난 후 결국 탈퇴하게 된다. 아마도 음악적 성향과 견해차로 보여진다. 탈퇴 이후 여러 뮤지션의 세션 활동을 했었는데, 주목할 프로젝트가 재즈 드러머 알폰스 무존(Alphonse Mouzon)의 앨범과 카마인 어피스(Carmine Appice)와 투어여행을 함께 했었다.

1975년 토미 볼린(Tommy Bolin)은 첫 솔로 앨범 계약을 맺고 앨범 녹음에 들어간다. 그런데 기타 외에 보컬까지 소화하는데 보컬파트에 자신이 없었는데 이때 비치 보이스(Beach Boys)의 격려와 코치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앨범의 세션들의 면면이 화려하다. 데이빗 포스터(David Forster), 데이빗 샌본(David Sanborn), 얀 해머(Jan Hammer), 필 콜린스(Phil Collins), 제프 포카로(Jeff Porcaro), 글렌 휴즈(Glenn Hughes)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앨범 녹음 과정에서 딥 퍼플(Deep Purple)로부터 연락이 왔다.

딥 퍼플(Deep Purple)은 1974년 앨범 이후 기타리스트 리치 블랙모어(Ritchie Blackmore)가 밴드를 탈퇴한다. 블랙모어(Blackmore)는 딥 퍼플(Deep Purple)의 핵심 멤버이자 얼굴이었고 워낙 인기 많았던 기타리스트였는데 그 공백을 메우는 건 건 도무지 상상도 안 갔었고 밴드 자체도 내부적으로 어수선한 상태였다. 밴드를 그대로 해체할 것인지, 대체 기타리스트를 찾을지 논의했는데 결국 후임 기타리스트를 찾아보자는 것에 결론을 내렸다.

당시 딥 퍼플(Deep Purple)의 멤버들은 드러머 이언 페이스(Ian Paice)의 추천으로 빌리 코브햄(Billy Cobham)의 <Spectrum>을 데이빗 커버데일(David Coverdale), 건반주자 존 로드(Jon Lord)가 듣고 있었다고 한다. 이 앨범에서 많은 기여를 한 4곡의 리드 기타리스트인 토미 볼린(Tommy Bolin)을 눈여겨보고 있었고 테스트를 위해 4시간 동안 밴드와 잼 연주를 했고 그를 최종 딥 퍼플(Deep Purple)의 기타리스트로 낙점한다.

밴드는 바로 독일 뭔헨으로 건너가 새앨범 <Come Taste The Band> 작업을 시작하는데 9곡 중 7곡을 토미 볼린(Tommy Bolin)이 작곡한다. 볼린은 자신의 솔로 데뷔앨범과 딥 퍼플(Deep Purple)의 새앨범을 동시에 준비해야 하는 바쁜 나날을 보낸다. 딥 퍼플에 합류한 토미 볼린은 리치 블랙모어의 향기를 싹 지운 꽤 괜찮은 앨범을 발표하며 충분한 영향력을 보여줬지만 앨범은 상업적으로 실패하게 된다.

딥 퍼플(Deep Purple) 새 앨범은 1975년 10월에 발매됐고, 토미 볼린(Tommy Bolin)의 솔로 앨범 <Teaser>는 다음달 11월 거의 동시에 발매됐지만 자신의 솔로앨범 투어는 할 수 없었다. 딥 퍼플(Deep Purple)에 더 집중하며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 사실 그게 문제였다.

딥 퍼플 새 앨범은 적당히 잘 팔려 한동안 딥 퍼플에 활력을 불어넣는 듯 보였지만 앨범투어 콘서트가 시작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관객들은 타미 볼린(Tommy Bolin)이 블랙모어와 비슷한 솔로 연주를 기대했지만 이 둘은 스타일 자체가 아예 달랐다. 관객들은 “리치 블랙무어 어디 갔냐며?” 무대에 서 있는 토미 볼린(Tommy Bolin)에게 야유를 쏟아부었고 젊고 예민한 기타리스트는 비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비단 딥 퍼플(Deep Purple)에서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제임스 갱(James Gang)의 조 월시(Joe Walsh), 딥퍼플(Deep Purple)의 리치 블랙모어(Ritchie Blackmore)의 대체자였다는 것이다. 이런 슬픈 낙인은 그를 항상 따라 다녔고 괴롭혔다. 무대에 설 때마다 앞선 기타리스트조 월시(Joe Walsh)와 리치 블랙모어(Ritchie Blackmore)를 연호하는 관객들 때문에 주눅 들고 매우 힘들어했다. 여기에 마약 문제까지 겹쳤다. 마약은 심각한 수준으로 토미 볼린을 망가트렸고 여러 차례 수준 이하의 콘서트 공연이 이어졌다.

1976년 내부적으로 곪아 터져 있던 상태였던 딥 퍼플(Deep Purple)은 유럽 투어 후 데이빗 커버데일(David Coverdale)이 화이트 스네이크(White Snake) 결성을 위해 밴드를 떠나자 바로 해산하고 만다.

딥 퍼플 활동 시기와 겹쳐서 첫 번째 솔로앨범 <Teaser>는 제대로 된 홍보 활동과 투어가 없었지만 젊은 음악신동이 25살에 발표한 데뷔 앨범은 그동안 익혀온 자기 음악의 집대성이었다. 록앤롤, 하드록, 사이키델릭, 재즈록, 블루스록, 심지어 라틴과 레게까지 아주 꽉 차있는 앨범이었다.

폭넓은 기타연주를 선보이며 평론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아냈다. 바로 이 앨범에 수록된 “Savannah Woman”이 소피 마르소 광고 음악으로 쓰이며 뒤늦게 세상을 떠난 젊은 기타 천재의 존재를 알린 계기가 됐다. 거기에 기타만 뛰어난 것이 아닌 소울풀한 보컬 실력까지 선보이며 그 가능성을 제대로 보여준 데뷔앨범이었다.

첫 번째 트랙 “The Grind”부터 마지막 트랙 “Lotus”까지 이어지는 곡들은 다양한 장르와 분위기가 변화무쌍하다. 그냥 틀어놓으면 전 트랙을 다 듣게 된다. 당연히 2집 앨범도 똑같다. 솔로 앨범 2장은 무조건 추천한다. 개인적으로는 2집을 살짝 더 좋아한다. 그의 유작이기도 하지만 1집보다 더 다듬어지고 밀도감 높은 음악과 그루브가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딥 퍼플의 해산 통보를 받은 토미 볼린(Tommy Bolin)은 바로 2집 앨범 녹음에 들어간다. <Private Eyes> 앨범은 1집 앨범이 재즈록을 비롯한 다양한 장르를 앨범 하나에 녹였다면 2집은 장르적인 색깔을 줄였고 전통적인 하드록 색채가 더 짙어진 면도 있다. “Bustin’ Out For Rosey”에서는 넘실거리는 드럼과 베이스에 섹시한 토미 볼린의 목소리와 찔러주는 기타 톤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9분 정도의 “Post Toastee”는 긴 잼 섹션으로 이뤄진 곡으로 멋진 연주를 감상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좋아한 곡들이 멋진 슬라이드 솔로가 들어간 “Sweet Burgundy”와 1집의 “Savannah Woman”의 연장선에 있는 “Gypsy Soul”을 아주 좋아했다. 그리고 아련한 발라드 “Hello Again”까지 전곡이 너무 좋다. 앨범을 걸면 전곡을 다 들을 수밖에 없는 마성의 앨범이다.

1976년 9월 2집 앨범이 발매되고 자유롭게 Tommy Bolin Band를 결성해 순회공연을 펼쳤다. 2집 <Private Eyes> 홍보 차원에서 1976년 12월 3일 마이애미에서 제프 벡(Jeff Beck)공연 오프닝을 했고 “Post Toastee” 연주로 앙코르를 장식하며 무대를 마치고 몇 시간 후 호텔방에서 혼수상태로 발견됐는데 헤로인과 알코올, 코카인을 포함한 다양한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다. 응급조치를 받고 앰블런스를 불렀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토미 볼린(Tommy Bolin)은 기본적으로 하드록 성향의 기타 연주자였지만 하드록뿐 아니라 재즈적 터치와 블루스의 향기도 가득 담은 연주를 선보였다. 재즈록 쪽에서 많은 세션 초대는 기타 연주에 재즈적인 색채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또, 기타리스트지만 보컬에 관해서도 몽환적이고 블루스적인 끈적임이 녹아 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섹시한 느낌까지 묻어난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얼마나 높은 곳에 도달했을지 늘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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