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애 앨범들

여성 재즈보컬 중 빌리 헐리데이(Billie Holiday), 여성 록 보컬중 재니스 조플린 (Janis Joplin) 이 둘의 공통점은 그 어떤 노래 잘하는 가수가 등장해도 이 둘을 뛰어넘기 쉽지 않다. 실제로 제2의 빌리 헐리데이, 제2의 재니스 조플린이라 불린 가수가 어디 한 둘이랴? 제2의 누구라는 오명은 끝내 벗어던지기 쉽지 않은 오명이다. 지금 노래 잘하는 사람이 워낙 많은 시대고 엄청난 여성 보컬이 즐비했었고 가창력이나 기교는 모든 면에서 뛰어 넘고도 남겠지만 저 둘만의 상징성이나 필과 오리지널리티, 그 시대상에서 이뤄낸 성과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의 존재감을 뛰어넘기 쉽지 않다.

존재감 확실한 여성보컬 한영애

그런 면에서 한국에선 여성 보컬 중에 어떤 이들이 떠오를까? 수많은 가수들이 있었지만, 얼핏 이미자, 김추자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개성과 존재감면에선 단연 한영애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다. 솔직히 블루스 음악이 대중 친화적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한영애가 블루스만 하진 않았다. 한영애가 함께한 해바라기 시절도 있었고, 포크 음악으로 낸 앨범들도 존재하고 가수 몰래 발표했던 앨범도 있어서 비공식앨범도 존재한다.

어느 앨범 하나를 뚝 떼어놓고 들어도 목소리가 가진 개성은 대한민국 여가수 중 한영애가 독보적이다. 물론 대중적인 인기 면에서는 이전 세대 윤복희도 있고 비슷한 시기에 윤시내도 있지만, 블루스와 록이라는 장르에 있어서 한영애는 독보적 위치에 있는 가수다. 솔직히 음색이며 발성, 감성 모든 면에서 유니크하다. 독특한 허스키 보이스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인물이며, 흉내조차도 불가능해서 목소리만 들어도 한영애임을 단박에 알아낼 정도다.

음악적 스펙트럼도 포크, 블루스, 록, 트로트, 알앤비, 레게 심지어 트립합 앨범까지 발매한 적이 있을 만큼 한영애가 안 해본 장르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폭이 넓다. 

한영애 – 해바리기 시절

포크 뮤지션 김의철에 의해 한영애는 발탁된다. 당시 김의철이 시작하고 이끌었던 노래중창모임 해바라기 멤버로 참여한 계기이다. 참고로 김의철은 김광석이 부른 “불행아”의 원곡 “저 하늘의 구름따라” 원곡자이고 이 노래는 이광조도 불렀다. 확실히 초기 기반을 다진 것은 김의철이었지만 솔로앨범을 발표하며 빠지게 됐고, 해바라기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건 이정선이다.

해바라기 1기 멤버로 이정선, 한영애, 이주호, 김영미였고 중간에 이주호가 군 입대를 하고 그 자리를 이광조가 채우기도 했었다. 이시기 2장의 앨범을 발표하며 멋진 화음의 포크음악을 선보였지만 이정선과 이광조는 엄인호와 함께 트리오 ‘풍선’을 결성하며 해바라기에서 빠졌다. 한영애도 연극무대로 가버렸고 김영미는 유학길에 올랐다. 이후 이주호가 이끄는 해바리기를 우리는 더 많이 기억한다. 

한영애 비공식 음악 – 0집, 작은동산

해바라기 활동 시기와 맞물려 솔로 앨범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녹음까지 마친 상태에서 음반사가 갑자기 상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앨범을 엎어버리는 일이 발생한다. 그런데 더 놀랍고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는데 다른 음반사 지구레코드가 1977년 그녀에게 상의도 없이 무단으로 음반을 발매해 버린다. 이때 앨범 쟈켓은 이정선이 파스텔로 그린 한영애의 캐리커처가 사용됐고, 수록된 다수의 곡이 이정선 노래로 <이정선 작-편곡집>으로 앨범에 표기되어 있기도 하다. 

1번 트랙에 수록된 “어젯밤 꿈”은 4월과 5월의 히트곡으로 알려진 “장미”의 원곡인데 이 장미 역시 이정선 작품이다. 가사만 살짝 다를 뿐 코드나 곡의 진행이 비슷하다. 아마도 한영애의 이 앨범이 빠그라지면서 이 곡은 다시 4월과 5월에게 전해지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재미있는 것은 이 앨범은 우리가 알고 있던 한영애를 만날 수 없다. 특유의 독특한 창법과 블루지한 목소리는 온데간데없고 잔잔한 포크송들이 담겨있는 진귀한 한영애의 앨범이기도 하다. 한영애 스스로 1986년 데뷔라고 말하고 자신의 솔로 앨범 1집을 정식데뷔라고 여긴다. 

1978년에 또 한 장의 비공식 앨범이 발표되는데 [작은동산]이란 타이틀로 발매됐다. 시간이 지나 재발매까지 되어서 쟈켓 버전도 2가지가 있고, “작은동산”,“갑돌이와 갑순이”,“설악산” 이런 곡들이 수록되어 있다. 아~이 앨범을 말하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굉장히 많다. 가장 한영애스럽지 않은 앨범이라고 해야 될 것 같다. 

한영애 전성기

아마도 일련의 상황들로 미루어 봤을 때 가수 활동에 회의를 느끼게 되고, 연극배우로의 삶을 선택한다. 6년 정도 연극배우로 활동한 후 다시 가수로 돌아오게 된다. 이때가 바로 1986년 1집 앨범이 발매된 때다. 1집에는 “여울목”과 “완행열차”가 인기가 있었다. 거기에 엄인호의 대표작 “도시의 밤”, 이정선의 “건널 수 없는 강” 등이 수록되어 있었다. 동시에 이정선과 엄인호가 있던 신촌블루스 활동도 함께 하는데 신촌블루스 1집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킨다. 

1988년 2집 [바라본다]를 냈는데 이 앨범으로 확고한 자기 색채를 찾은 느낌이었다. 신촌블루스 활동으로 블루스적 색채가 더욱 진해졌고 각종 콘서트와 옴니버스 앨범을 발표하면서 자신만의 보컬 스타일을 확립하고 본궤도에 오른 느낌이다. 윤명운의 “누구없소?”와 처음 들었을 때 충격적인 곡 “코뿔소”에선 샤우팅을 선보인다. 일렉기타의 비중이 늘어난 경향이 있고 록적인 요소가 더욱 가미된 곡이었다. 또, 작은 거인 김수철의 작품 “바라본다”도 압권이다. 지금은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오른 당시 언더그라운드에서 대표주자들이 이 노래 코러스로 대거 참여했다. 전인권, 김현식, 우순실, 윤명운, 박주연 외 한 가닥 하는 선수들이 자진해서 참여해줬다.

프로듀서 송홍섭의 역할도 무시하지 못하고, 유재하의 곡 ‘비애’, 엄인호 ‘루씰’, 이정선 ‘여인 #3’, 들으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겨울 노래 ‘호호호’는 언제 들어도 기분 좋아지는 곡이다. 한영애 스타일의 완성은 단연 2집부터였다. 

3집 1992, 1992년 이즈음 한국대중음악 황금기의 시작이었고 한편으로는 언더그라운드는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대마초 사건으로 신촌블루스는 와해 됐고, 김현식은 고인이 됐으며 기존의 오버나 언더나 큰 변화의 물결이 일렁이기 시작한 때이다. 그럼에도 한영애는 자기가 제일 잘하는 블루스와 연극을 하나로 묶어 연극적인 콘서트를 기획했고, 2집 이후 4년 만에 내놓은 3집에서는 ‘조율’과 ‘말도안돼’가 주목을 받았으며 블루스는 기본이며 해바라기 시절부터 했던 모던 포크와 록을 넘나드는 시도까지 한다. 

그리고 다음 해 1993년, 63빌딩에서 열린 단독 콘서트 실황앨범 ‘아우성’이 발매되는데, 당시 최고의 세션들과 프로듀서, 국내 최고의 음향팀이 투입돼 극적인 만족감을 선사하는 앨범이 탄생한다. 현장의 생생함이 그대로 전해지는 국내 몇 안 되는 라이브 실황앨범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아마 [아우성] 이 라이브 앨범까지가 한영애 솔로 앨범의 최정점이었다. 

이후 한영애의 앨범들

물론 이후에 발매된 앨범들은 실험적인 시도와 평균 이상의 완성도 높은 음반들을 발매하고 늘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병우와 협연한 4집은 잔잔하고 무리 없으며, 세기말 1999년에 발표된 5집은 일부 트립합 분위기와 전자음악들이 등장하며 다소 이질적이었지만 “봄날은 간다”의 리메이크가 신선함을 선사해줬다. 

개인적으로는 2001년에 발표된 [스페셜 에디터 5 플러스] 앨범을 좋아한다. 일종의 베스트 앨범의 형태에 신곡이 포함됐는데 여기에 “푸른 칵테일의 향기”를 정말 좋아했다. 여름만 되면 듣는 노래 중에 한 곡이다. 

그리고 2003년에 발표된 [Behind Time 1925-1955] 앨범을 좋아한다. 우리 옛 가요 300곡 중에서 14곡을 골라 리메이크 했는데, 선곡된 14곡은 어느 시대에나 공감할 수 있는 노랫말 위주로 선곡해 만든 앨범이었다. ‘목포의 눈물’,‘애수의 소야곡’,‘사의찬미’,‘굳세어라 금순아’ 등이 수록되어 있는데 들으면서 이런 것이 한국적인 정통 재즈이자 블루스 같은 느낌까지 받았다. 

한국대중음악에서 한영애만큼 독특한 가수가 있었을까? 음악적 성취는 물론이고 음악에 있어서 그 어떤 도전과 실험을 마다하지 않는 정신은 정말 귀감이 되고도 남는다. 블루스로 쌓은 내공에 연극 무대의 경험까지 아직 직접 콘서트에서 보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고, 언제일지 모를 새 앨범 소식이 마냥 기다려진다. 디지털 싱글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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