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에로 영화의 정점을 찍은 영화는 단연 “애마부인”시리즈였다. 13편이나 제작됐다고 하니 그 인기가 가늠이 안 된다. 007시리즈나 미션임파서블같은 프랜차이즈 영화만큼의 시리즈를 이어갔다는 얘기다. 이 정도면 지금 관점에서는 흥행이 엄청 됐다는 얘기다. 한국영화의 시대적 흐름을 살펴보자면 1960년대는 “미워도 다시 한번”으로 대표되는 신파가 주류였고, 1970년대는 “별들의 고향”으로 대표되는 호스티스물이 대세였다고 한다. 1980년대에는 에로물이 영화계의 흐름을 주도했고 그 시작점이 바로 “애마부인”이었다.
한국의 에로영화 7080
재미있는 것은 이런 영화들이 모두 시대상을 대변하지는 않지만, 어찌 됐건 시대를 엿볼 수는 있다. 70년대에 등장한 “영자의 전성시대”나 “별들의 고향” 이런 영화들을 호스티스물이라고 표현하는데, 영화 장르로 사회적 신분이 낮은 여성의 사랑이야기를 퉁쳐서 호스티스물이라고 불렀다. 급변하는 70년대 산업화 시대 속에서 사회적 약자였던 여성의 소외와 희생을 그리기도 하고, 철저히 수동적인 입장으로 묘사됐다. 하지만 80년대 에로물은 이런 사회성은 개나 줘버리라고 여성의 개인적 욕망이나 성욕이나 순수 향락적인 주제를 다뤘다는 점에서 이전 시대와 차이를 보인다.
80년대 이런 영화들의 배경은 한국현대사 시간에 배운 전두환 정권 초기의 국민들의 정치적 관심사를 돌리기 위한 3S정책 이른바 스포츠, 스크린, 섹스 정책의 일환이었다는 것이다. 1980년대 전두환 정부가 군사 독재로 인한 반발이 신경 쓰였고, 정치적 관심을 어떻게든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었을 테니 스포츠에선 프로야구가 시작됐고, 스크린과 섹스에서는 더없이 훌륭한 에로영화들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1982년 극장개봉작 56편 중 35편이 에로영화였다.
애마부인
감독 정인엽, 출연 안소영, 임동진, 하명중, 하재영이 출연했다고 한다. 누구인지 봐도 모르겠다. 줄거리는 생략한다. 1982년 2월 6일 개봉했고 상영 당시 누적관객수가 총 31만 명 정도로 집계 됐는데 이후 비디오 시장에서는 훨씬 더 높은 수치라고 봐야겠다. 1982년 2월이면 내가 초등학교에도 입학 전이라 딱히 할 말도 없다. 그리고 당시 에로티시즘 영화의 대명사 실비아 크리스탈 주연의 “엠마뉴엘 부인”에서 모티브를 가져왔고, 상당 부분 유사한 장면들이 많았을 것으로 예상한다. 일종의 레퍼런스로 엠마뉴엘을 쓴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재미있는 것이 영화의 그 어떤 개연성과 연관도 없는 말(애마)이 등장하는데 제목 때문에 무조건 말을 탔어야 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주인공이 나체로 말을 타는 장면이 나온다고 한다. 한 인터뷰를 보니 이 씬을 찍다가 하혈까지 했다고 한다. 도대체 왜 나체로 말을 타고 달려야 했을까? 숨겨진 상징이 있었나 싶다.
그럼에도 이 영화음악은 숨은보석
주정이의 “서글픈 사랑”이 애마부인의 주제곡이었다. 주정이는 1970년대 인기 여성 포크듀오 산이슬 출신이었다. 1973년 박경애와 주정이 둘로 구성된 듀오였는데, 이름처럼 맑고 고운 음색으로 순수한 동화 같은 노래들을 주로 들려줬었다. “이사가는 날”, “밤비야”가 제법 알려지며 히트곡이 됐다. 당시 포크 음악들이 지닌 저항적이거나 은유적이지 않고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노래하는 스타일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1977년 각자 솔로 음반을 내면 돌연 해체하게 되는데 박경애는 “곡예사의 첫사랑”,“상처” 등의 곡으로 인기가수 반열에 올랐는데 반해 주정이는 솔로 앨범들이 그리 알려진 편은 아니었고, 가장 히트한 곡이 바로 영화 “애마부인”의 주제곡 “서글픈 사랑”이었다.
영화음악가 신병하
이 영화의 음악감독은 당시 신인이었던 신병하였다. 이 영화 덕분에 영화계는 물론이고 언론으로부터 무서운 신인으로 주목받았고, 이후 80년대를 대표하는 드라마, 영화음악가로 성장한다. 신병하는 사운드트랙 앨범으로 1979년부터 2000년까지 활동했는데 거의 80편 가까운 영화와 70편의 드라마 음악을 만든 사운드트랙의 교과서라고 불렸던 인물이다.
씨받이, 접시꽃 당신, 장군의 아들, 남부군, 하얀 전쟁 등 수없이 많은 영화와 TV드라마 중 대표작이 ‘사랑과 야망’, 베스트셀러극장 ‘소나기’가 특히 화제가 됐고 유명한데 개인적으로 이 곡을 좋아했다. 당시 TV 이 작품을 봤는데 그 멜로디가 계속 귓가에 아른거렸다. 후에 라디오에서 딱 한 번 들었는데 이 곡을 찾을길이 없었다. 그런데 90년대 중반에 이 곡을 찾았는데 생뚱맞게도 이미배 노래모음 다섯번째 이 앨범에 “소나기”가 수록되어 있다. 아니 도대체 왜? 이 노래가 여기에 실려있는거지? 지금도 의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황순원 ‘소나기’를 TV드라마 단편으로 만든 것인데 이 음악이 아름답고 아련하다. 곡 중간에 등장한 허밍은 신병하의 자녀 신민의 목소리다.
95년 SBS 장희빈, 1997년 MBC ‘그대 그리고 나’ 같은 작품들이 TV드라마 대표작이다. 정말 150편의 영화드라마 음악을 만들었으니 엄청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
사실 신병하는 영화음악가 이전에 미8군 무대에서 활동했던 베이스 연주자였다. 그룹 사계절 (Four Season)에서 활동했는데 윤시내를 키워낸 인물 역시 신병하였다. 사계절의 유일한 정규앨범에는 젊은 시절의 유현상(백두산)이 기타를, 보컬이 윤시내였다. 윤시내의 대표곡 “공연히”는 약간 충격적인 곡인데 펑키리듬에 관악기도 등장하고 윤시내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샤우팅을 하는 장면과 클레오파트라 머리까지 당시로는 파격이었다. 이 곡을 편곡해준 인물도 바로 신병하였다.
영화 애마부인 주제가 “서글픈 사랑”, 신병하 작편곡집 주정이 노래모음
확실히 ‘산이슬’ 때 음악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주정이를 만날 수 있다. 당시 “서글픈 사랑”이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재밌게도 KBS와 MBC의 심의 결과가 달랐다. KBS는 별문제 없었지만, MBC는 자체심의에서 가수 주정이의 “감정 이입이 지나치다.”는 이유로 방송 금지곡으로 지정했었다.
그런데 내가 정작 이 앨범을 좋아하는 이유는 “서글픈 사랑” 때문이 전혀 아니다. 영화도 못 봤을뿐더러, 주제곡이 어떤 곡인지조차 몰랐었다. 2018년경 프랑스 에로영화의 결정판 ‘엠마뉴엘부인의 사랑’과 관련된 음악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애마부인’ 주제가를 알게 되면서다. 속으로 ‘대박 애마부인 주제곡도 있어? 였고, 주정이 노래 모음을 유튜브에서 차근차근 듣고 있는데 “서글픈 사랑”은 귀에도 안 들어왔고, 단번에 귀를 사로잡은 트랙은 “사랑이 익을때” 라는 Side A 마지막 트랙이었다. 슬로우 미디엄 템포의 펑키곡으로 고급진 브라스와 절묘한 악기들의 합, 무엇보다 베이스라인이 끝내준다. 신병하 본인이 베이스 주자라 분명 신경을 썼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다. 반복되는 리듬과 적재적소에 꽂아주는 브라스 파트가 굉장히 세련된 느낌이었다. ‘아니 1982년에 이런 곡이 이런 사운드로 나왔어? 고급진데…’
그래서 앨범 전체를 정주행하면서 한 곡 한 곡 다 들었다. 이 앨범은 한마디로 대박이었다. 앨범이 전체적으로 수작이다. 앨범의 모든 사운드가 정갈하게 잡혀있다. 어느 하나 튀는 것이 없고, 균일하게 밸런스가 좋다. 또, 가사와 반주 녹음까지 완벽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편곡의 힘이 느껴지는 앨범이다. 작곡이 뼈라면 편곡은 그 뼈에 살을 붙이는 작업인데 많은 악기가 골고루 들어갔지만 과하지 않고 딱 적당하게 필요한 만큼 나올 때 나와주고 빠져줄 때 빠지는 편곡이다. 70년대 활동했던 밴드 중 편곡하면 정성조와 신병하 이 둘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인물들이었다. 복잡하고 어려운 편곡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던 인물들로 유명했다.
“당신은 갈대였었나요” 이 곡도 훌륭하다. 멜로디와 편곡 좋고 가사까지 훌륭하다. “서글픈 사랑”이 쥐어짜듯 애절한 트로트에 가깝다면 이 노래는 더 잔잔하고 아련하게 부르는 고급진 성인지향 발라드 정도라 하겠다. 오히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서글픈 사랑”보다 이 트랙이 훨씬 좋다. 서글픈 사랑이 80년대라면 당신은 갈대였었나요는 90년대 중반에 등장한 곡처럼 들린다.
“당신 모르게” 이 노래 역시 뽕삘이 스물스물 배어있지만, 들리는 소리만 들어서는 대충 만든 펑키 냄새만 풍기는 곡 같지만, 편곡을 뜯어보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펑키 넘버라 하겠다. 이 앨범에 참여한 세션들의 실력이 한방에 드러나는 트랙이다. 드럼베이스 탄탄하고 펑키 기타 적당하고 찔러주고 감칠맛 나게 치고빠지는 브라스도 딱 좋다.
앨범 한 장에 다양한 장르의 곡들이 넘쳐나는데 “무지개를 쫓던 소녀”는 포크듀오 산이슬 때 느낌까지 묻어난다. 동화처럼 만들어진 가사와 어쿠스틱 하지만 잘 짜여진 편곡 위에 주정이의 보컬이 한 몫 한다. 가수 주정이의 장르를 가리지 않는 확장성과 장르적응력이 대단하다는 느낌이다.
아쉽게도 이 앨범은 자주 눈에 띄지 않는다. LP판을 어렵게 수소문해서 몇 달을 기다린 끝에 겨우 구했다. 음반이 많이 팔렸다면 구하기도 쉬웠겠지만, 이 음반은 생각보다 판매량이 많지는 않았다. 주정이는 이후에도 자신의 대표곡인 “서글픈 사랑”은 앨범에 꼭꼭 수록해서 여러 차례 앨범을 발표하지만, 다른 곡들은 쉬이 만나기 쉽지 않다.
젊은 영화음악가 신병하가 심혈을 기울여 작곡하고 편곡해서 일궈낸 음반으로 더 많이 알려지길 바란다. 우리나라에서도 82년에도 이런 고급진 사운드를 뽑아낸 앨범이 있다는 것을 더 알리고 싶어진다. 그런데 이 노래들이 모두 다 “애마부인”에 나온 건지는 알 수 없다. 애마부인을 뒤늦게 찾아봐야 심각히 고민중이다. 적어도 아직 보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