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반 중에 가장 많이 팔린 음반은 뭘까? 전 세계 모든 음반을 통계를 낼 수 없지만, 적어도 클래식 음반 중에 베스트셀링 앨범은 조금 예상 가능하다. 바흐(J.S.Bach), 베토벤(Beethoven), 모차르트(Mozart), 비발디(Vivaldi)의 유명 작품 정도의 음반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그중에서 비빌디(Vivaldi)의 사계(Four Seasons)는 정말 많이 팔렸을 것으로 예상한다.
비발디(Vivaldi) 사계, 유명 연주는?
이탈리아 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가 1723년에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 모음집으로 작품 번호는Op.8, No.1-4 (RV번호는 각각 269,315,293,297)이다. 현대인에게도 매우 익숙한 클래식의 고전중의 고전이다. 각종 TV프로그램이나 광고 및 안내방송에서 자주 듣게 되는 익숙한 악곡이다. 특히 여름 3악장, 겨울 1악장이 유명하고, 봄 1악장, 가을 1악장 파트는 차임벨, 대기신호음으로 쓰이는 경우도 많다.
도입부만 들어도 다 아는 비발디 ‘사계’ 가장 많이 접한 음반은 단연 바이올린주자 펠릭스 아요(Felix Ayo)를 필두로 로마에서 결성된 이 무지치(I Musici)버전이 가장 유명하다. 비발디의 사계는 오랜 세월 묻혀서 거의 연주되지 않다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이 무지치(I Musici)가 연주하면서 비로소 재평가 되어 부활한 곡이었다. 그래서 “사계는 이무지치”라는 공식을 만들 정도로 유명한 연주다. 최초 레코딩은 1955년 모노 녹음이고 1959년 스테레오판으로 음반을 발매하여 세상에 알렸다. 전곡은 그야말로 교과서적인 차분함이 일품이다.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팔린 비발디 ‘사계’일 것이다. 이 무지치(I Musici)는 이 곡을 리더가 바뀔 때 마다 6번이나 재녹음을 했지만 첫 레코딩이 가장 잘 된 연주로 평가받는다.
다음으로 유명한 고전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urbert Von Karajan) 지휘로 베를린 필하모닉오케스트라 연주, 미헬 수발베 독주의 사계도 유명한데 이 앨범은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제작한 음반으로 특히 앨범커버가 유명하다. 사계절의 변화를 사과의 일생에 대비시켰다는 점이 주목된다.
1989년 영국의 바이올린주자 나이젤 케네디(Nigel Kennedy)가 깜짝 등장하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곡을 연주하면서 계절에 맞는 옷을 입은 채로 연주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여름을 연주할 때는 선글라스에 반팔차림 겨울을 연주할 때는 장갑에 겨울 코트를 입고 연주하는 식이었다. 당시 나름 클래식계에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반대로 고지식한 사람들의 혹평도 뒤따랐지만 신선하긴 했었다.
사계는 이 무지치(I Musici)라는 공식에 균열을 깬 연주가 있었다. 바로 파비오 비욘디(Fabio Biondi)와 에우로파 갈란테(Europa Galante)가 들려주는 사계는 최고의 속도감과 극도의 긴장감, 세련된 완급 조절과 세밀한 강약의 대비로 비발디의 사계를 재해석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이무지치(I Musci) 연주가 평이하게 느껴질 정도로 파비오 비욘디의 사계는 실험적인 연주를 들려줬다.
그리고 사계 명연주 명반 중에 다섯 손가락에 들어가는 연주가 줄리아노 카르미뇰라(Giuliano Carmignola)도 인상적이다. 비발디 시대의 바로크시절의 바이올린 오리지널 악기(원전악기)로 연주했고, 예전 악기임에도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럽고 편안한 연주를 들려줘 발매 당시 큰 화제가 됐다.
물론 전 세계 스타급 바이올린주자들 중에 이곡을 연주 안하고 녹음 안 한 바이올린 주자를 찾기가 더 어려울 것 같은 레퍼토리다. 각자의 취향에 따라 정경화, 길 샤함(Gil Shaham), 재니 얀센(Janine Jansen) 등등 정말 많은 연주와 음반이 있다.
충격적인 막스 리히터의 재구성 ‘사계’ 2012년, 2022년 두 가지 버전
수많은 사계 중에 가장 충격적인 것은 단연 2012년 8월 31일 안드레 드 리더(Andre De Ridder)의 지휘,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 다니엘 호프(Daniel Hope)의 바이올린이 함께한 막시 리히터(Max Richter)의 <Recomposition of The Four Seasons>였다. 이 음반은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발매됐고 막스 리히터(Max Richter)가 비발디의 ‘사계’를 완벽하게 재구성하고 재해석하면서 엄청난 화제가 됐었다. 막스 리히터(Max Richter)는 비발디의 원본 자료 중 75%를 버리고 25%만으로 앨범을 재작곡 했다고 하지만 이 말은 이 25%만으로도 충분히 비발디의 ‘사계’를 느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포스트모던 또는 미니멀리스트 음악에 기반 한 단계적으로 쌓아 올리고 반복해서 들려주는 방식으로 아예 새로운 곡을 만들어버렸지만 결국 비발디의 사계였다.
음악 작품을 재구성하고 재가공 한다는 아이디어는 비발디 시대의 일반적인 관행이었지만 레코딩 시대를 맞이해서는 악보대로 연주하려는 경향이 더 강해졌다. 심지어 원전악기, 고악기까지 등장하며 그 시대를 재현하려는 노력도 일어났다. 그런데 클래식의 대중화와 클래식을 좋아하는 청중들에게 더 신선하고 흥미로운 기회를 제공하고 침체된 클래식계의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에서 재구성 프로젝트들이 열리기 시작했고 그 일환으로 막스 리히터의 재구성 사계를 만날 수 있게 됐다.
미니멀리스트 바로크풍의 트위스트를 가미한 완전히 새로운 음악을 창조하면서 이전에 시도된 적이 없는 새로운 방식이었다. 막스 리히터(Max Richter)가 비발디의 ‘사계’를 재구성한 이유는 어린 시절 비발디에 매료된 이후 이 ‘사계’를 재구성하고 싶은 강한 욕심이 생겼고 실제로 ‘사계’를 재구성했는데 다시 원작과 사랑에 빠졌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 바이올린 협주곡은 변화하는 계절을 눈에 그림을 펼쳐 놓은 듯 음악으로 묘사해 주는 매혹적인 작품이다. 많은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막스 리히터(Max Richter)도 이 사계에 매료됐고 비발디의 규칙적인 패턴이 막스 리히터가 쓰고 있던 음악의 한 가닥인 포스트 미니멀리즘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어 이 작업을 시작했지만 이 작업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비발디의 선율이 워낙 강렬하게 머릿속에 내장되어 있어 쉽게 떨쳐내기 쉽지 않았다고 한다. 당연히 이 곡을 연주할 다니엘 호프(Daniel Hope)도 마찬가지였다.
2022년에는 <Max Richter – The New Four Seasons: Vivaldi Recomposed>를 발매한다. 2012년, 비발디의 사계를 현대적으로 훌륭한 재해석해 평단은 물론 대중까지 사로잡았고 발매 10주년을 맞아 또 한번 새롭게 레코딩한다. 2022년 버전은 짧은 현과 거트현 등 시대악기와 70년대 빈티지 무그 신디사이저를 사용하는 등 비발디가 살었던 바로크 시대와 우리 시대를 연결하는 고전적이면서도 독창적인 사운드가 담겼다.
굳이 2012년과 2022년을 비교하자면 2012년이 과거를 현재로 현대적인 느낌으로 가져왔다면, 2022년에서는 펌웨어 업데이트를 단행한 느낌이다. 자잘한 버그를 수정하거나 아쉬웠던 부분을 과감하게 없앤 느낌이다. 파격은 2012년이 앞서고 그동안 익숙했던 것을 완전 재구성했다면 2022년 버전은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고 단지 익숙한 것으로 돌아갔다. 2012년은 1730년대에서 2010년대로 점프한 느낌인데 2022년은 1730년대에서 1970년대로 점프한 느낌이다.
막스 리히터는 누구?
막스 리히터(Max Richter)는 독일 태생의 영국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다. 포스트 미니멀리즘과 현대 클래식 스타일로 작업하는데 무대, 오페라, 발레, 영화를 위한 음악을 편곡, 연주, 작곡한다. 에딘버러 대학교, 런던 왕립음악원에서 작곡을 전공했고 이탈리아의 실험적인 작곡가이자 전자음악에도 선구적인 작품으로 유명한 루치아노 베리오의 제자이기도 하다. 학업을 마친 후 리히터는 6명의 피아니스트로 구성된 현대 클래식 앙상블 피아노 서커스(Piano Curcus)를 공동 결성해 활동했다.
이팀의 주요 레퍼토리는 그는 10년 동안 그룹에 머물면서 아르보 파르트(Arvo Pärt), 브라이언 이노(Brian Eno), 필립 글라스(Philip Glass), 줄리아 울프(Julia Wolfe), 스티브 라이히(Steve Reich)와 같은 미니멀리스트 음악가들의 작품을 연주했다. 이 앙상블은 데카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5장의 앨범을 제작하기도 했다.
영화 사운드트랙 작업과 앨범들
2000년대 초부터 클래식 음악 및 얼터너티브 대중음악 스타일을 아우르는 현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작곡가 중 한명이고 후기 미니멀리즘 작곡에 영향을 미친 거장 중 한 명이다. 무엇보다 OST 작업에 족적을 남기는 중이다. 사실 미니멀리즘 작곡가 필립 글라스(Philip Glass)도 영화음악에 두각을 드러냈는데 막스 리히터도 사운드트랙 작업이 활발한 작곡가다. 수년에 걸쳐 수많은 영화 및 TV사운드 트랙을 제작했는데 음악 성향상 무거운 영화 사운드트랙을 주로 맡는 경향이 있다.
2007년 처음으로 사운드트랙 작업을 시작하는데 이스라엘의 레바논 내전 개입과 그 과정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을 소재로 한 앙리 폴만 감독의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바시르와 왈츠를”을 시작으로 SF영화 “컨택트”,“애드 아스트라”, “더 콩그레스”가 대표작들이다.
2015년에는 만성적인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현대인을 위한 자장가 <Sleep>을 발매했다.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막스 리히터가 작곡한 셈이다. 특히 애플뮤직에 8시간에 달하는 풀 버전을 공개해 충격을 안겼는데 이에 대해 “현대인들이 잠들기 힘든 시대를 사는 모습에서 내 음악을 들으면서 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도 내 음악이 끝나면 일어나길 바란다”며 작곡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 8시간 중에 1시간 분량의 <From Sleep> 앨범이 인기를 모으자, 아예 8시간짜리 풀 버전도 실물음반으로 발매했다. 1시간짜리 음반은 수면 준비용으로 들으면 되고, 8시간짜리 음반은 수면 중에 들으면 된다고 한다.
현재 클래식작곡가로 영화음악감독으로나 가장 수요가 많은 아티스트는 확실히 막스 리히터(Max Richter)다. 다음에 어떤 행보를 보여줄지? 클래식 작곡가로서 경력이나 상업적인 성공은 막스 리히터(Max Richter)에게 있어서 운신의 폭을 넓힐 수 있는 대목은 확실하다. 적어도 레이블의 전폭적인 지지와 넉넉한 예산확보를 활용할 수 있는 위치에 놓여있고 발표되는 앨범들에 주목받는 위치에 놓여있다는 점은 당분간 변하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