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후반과 80년대 중반까지 가수들의 등용문은 확실히 가요제들이었다. MBC의 대학가요제를 시작으로 강변가요제, 신인가요제, KBS에서 주최한 연포가요제, TBC 해변가요제 등등 지금으로 따지면 각종 TV 오디션 프로그램의 원조 같은 느낌으로 이런 가요제를 통해 음악관계자들의 눈에 띄면서 가수로 데뷔하고 앨범까지 발매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고 모든 가요제가 다 히트한 것은 아니고 제일 머릿속에 남는 건 역시 MBC 대학가요제와 강변가요제다. 그리고 잘 알려진 가요제는 아니지만 연포가요제를 통해 알려진 김혁의 유일한 솔로 앨범에 대해 알아보자.
연포가요제
1981년 KBS 3라디오에서 개최해 연포해수욕장에서 열렸던 연포가요제 사랑의 듀엣쇼는 원래 모태가 TBC 동양방송에서 1979년 12월 연말 특집으로 진행한 사랑의 듀엣쇼였다.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TBC는 사라지고 KBS로 주관 방송사가 변경됐다. 1979년 1회 대회는 혼성듀엣으만 참가자격이 주어졌지만 1981년 여름 연포해수욕장에서 열린 제2회 대회는 남녀 성별을 가리지 않고 모든 듀엣이 출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연포가요제는 생각보다 역사가 깊었다. 1973년 8월 연포해수욕장 개장 기념으로 TBC에서 개최했던 전국 보컬그룹 경영대회의 시초였다. 그 인연으로 5년 뒤 1978년 TBC 제1회 해변가요제가 이곳에서 열렸다. 하지만 KBS에서 주최한 1981년 연포가요제는 TBC 해변가요제만큼 대중적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 대회에 출전한 김범룡을 비롯해 남성 듀엣 배따라기, 혁과 준 등 좋은 신인 가수들과 노래들이 많이 배출됐다.
최우수상을 받은 남성 듀엣 혁과 준, 김혁
최우수상은 남성듀엣 혁과 준의 “분내”가 차지했다. 혁과 준은 당시 연세대 2학년생인 김혁과 오세준으로 구성된 남성 듀엣이었다. 수상곡 “분내”는 김혁의 자작곡이었다. 리더 김혁은 수상 이후 1983년 예음사에서 데뷔 독집을 발표한다. 당시 앨범에서 “비몽”,“21살이 비망록” 등이 대학가는 물론이고 좋은 반응을 얻었었고 특히 최우수상은 받았던 “분내”는 다시 녹음했는데 이런 이유로 듀엣이 아닌 솔로곡으로 기억하는 이들도 많다.
연포가요제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김혁은 싱어송라이터답게 자신의 자작곡 5곡과 하덕규가 작사-작곡한 5곡을 음반의 흐름에 맞게 적절히 배치해서 발표했다. 그리고 김상배 작사-작곡의 “21살의 비망록”이 수록되어 있다. 나이와 어울리지 않은 조금 중후한 목소리와 80년대 대학 시절을 보낸 청춘의 나지막한 울림은 지금 들어도 전혀 촌스럽지 않다.
앨범 수록곡
이 앨범에서 가장 주목받았던 곡은 하덕규 작사-작곡의 “비몽”이었다. 떠돌이 남편이 세상 떠돌다 흰머리가 되어 조강지처를 찾아와 신세한탄 하는 것 같은 가사와 인생의 허무함과 헛된 꿈에 대한 우화같은 가사를 지닌 노래로 어떻게 들으면 구전 가요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어지는 “그대 목소리”는 시인과 촌장 1집에도 수록된 곡으로 비교해 들어보면 시인과 촌장에 비해 악기 구성은 심플하며 오히려 김혁 목소리에 초점이 맞혀진 편곡으로 호소력이 더해진 곡이 됐다. 김상배가 작사-작곡한 “21살의 비망록”은 1981년 단국대 그룹 ‘스물하나’의 대학가요제 출전곡을 김혁이 다시 불렀다. 젊은 패기가 느껴지는 록밴드 버전의 노래가 김혁의 목소리를 만나면서 진중한 스타일로 바뀌었고 21살 인생의 출발점에 선 청춘을 잘 표현했다.
김혁 앨범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은 “외로운 항해”다. 하덕규가 작사-작곡한 곡은 너무 하덕규 느낌이 묻어나는 편이다. 김혁이 부르는 시인과 촌장의 다듬어지지 않은 뻣뻣함과 투박함이 전해진다. 그래서 오히려 싱어송라이터로서 자기 색을 잘 드러내는 “분내”,“외로운 항해”가 이 앨범에서 솔직하고 더 담백하게 들린다. 궁중 속 고독이 느껴지는 가사와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20대의 두려움과 고뇌가 담담하게 읊조리듯 부르는데 유재하 “가리워진 길” 가사도 생각이 나면서 방황하던 그 시기에 누구나 느꼈던 심정이 잘 드러난다.
1980년대 초반 연포가요제를 통해 등장해 단 1장의 독집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후 방송국PD로 활동했다고 전해지고 음악 활동은 더 이상의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김혁의 유일한 독집 LP 앨범은 희귀앨범으로 분류되어 구하기가 쉽지 않다. 그나마 2011년 뮤직리서치에서 28년 만에 CD로 재발매했는데 오리지널 마그네틱 마스터 테이프에서 음원을 발췌해 디지털로 리마스터링해 깔끔한 음질로 발매했다.
이 앨범에는 20대 청년의 풋풋함과 방황, 앞날에 대한 막연함도 투영되어 있다. 가사는 시적으로 들리기도 하고 우화 같기도 하며, 자신의 일기(비망록)를 읊조리는 김혁의 목소리로 진실성있게 전달된다. 그리고 20대 초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중후한 음색이 앨범전체를 정제되어 있고 안정감 있게 다가돈다. 어쩌면 잘 알려지지 않은 80년대 숨겨진 보석같은 포크 앨범이 김혁의 유일한 독집앨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