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P(레코드)판 보관이 문제

LP는 보는, 듣는, 만지는 재미가 가득한 오감을 자극하는 매체다. 미각은 빼겠다. 맛까지 보지는 않겠지만 LP는 참 재미있다. 그래서 오디오를 한다는 표현을 쓰듯, LP한다는 표현도 종종 쓴다. 동사가 잘못된거 아냐? LP를 가지고 뭘 한다는 것인가? ‘하다’라는 동사에는 참 많은 의미가 포함됐다.

듣는 행위, 디깅 하는 행위, 판매부터 구매까지, 귀한 판이 있는 곳이라면 거리와 장소, 시간과 상관없이 찾아다니는 모든 행위까지 그리고 구매한 음반을 세척하고 옷 입혀주고 쟈켓 관리해서 보관까지 이 모든 행위는 분명 하는 게 맞다. 그래서 한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그런데 문제는 관리에 있다. 우선 무겁고, 장소를 차지하고 온도와 습도, 먼지와의 싸움 등등 손이 많이 간다. 아마도 대부분의 LP들이 이사 몇 번 다니다 사라지는 경우는 이런 관리 문제 때문일 것이다. 나 홀로 산다면 좋아하는 LP음반들 쌓아 놓고 집안 곳곳에 멋진 라이브러리를 전면에 가득 채우고 살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분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집안의 가장이지만 힘없는 남자의 운명을 몸소 느껴야 하는 애처러움도 있겠고, 집안 구성원들의 따가운 눈총을 이겨내야 비로서 소소한 LP취미를 즐길 수 있다. 내돈내산 한 걸 좀 듣겠 다는데 그것 또한 눈치를 봐야 하는 처량함이란?? 그래서 지금까지 난 LP를 어떻게 보관, 관리해 왔는지 찾아봤다.

결혼 전 본가에서 보관했던 모습 바로 위의 사진들은 결혼  전 부모님과 살 때 내 방을 차지하고 있던 사진들이다. 그리고 아래 사진처럼 신혼 때는 나름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거의 10년 전 신혼 때 LP 랙이었다. 이때는 와이프에 성화에 못 이겨 들을 음반만 가져다 놓으라고 해서 본가에서 공간에 맞게 반만 공수해 놓은 음반들이었다. 공간적인 면에서 CD는 LP보다 가성비가 훨씬 좋다. 이 때 까지만 해도 주청취는 CD였고, LP는 가끔씩 생각날 때마다 듣는 정도였다. 이때 쓰던 랙은 주방싱크대 만드는 공장에 가서 사이즈 말하고 제작한 LP장이다. 가격대비 튼튼하고 좋았다. 비싼 원목은 엄두도 못 냈고 나무랙은 튼튼하지만 색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위안했다.

그러다 아이가 생기며 조금 평수가 큰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한쪽 벽면을 과감히 나에게 달라고 당당히 요구해 공간을 만들었다. 이때만 해도 와이프랑 합의한 내용은 딱 여기까지만 채우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본가에 있는 LP들을 추가로 공수해 어찌어찌 가득 채웠다.

한쪽 팬트리를 역시 싱크대 만드는 공장에서 제작해서 넣었다. 색상은 최대한 집안 분위기에 맞춰 회색 정도로 깔맞춤하는 센스를 보이며 스스로 대견해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LP 바람이 불었고, 재발매들이 미친듯이 이뤄졌다. 속절없이 질러댔고, 통장은 빈털털이가 되어갔고, 하루가 멀다 싶을 정도로 LP들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택배 박스는 더 자주 더 많이 왔고 눈치를 얼마나 봤는지 눈은 가자미눈이 됐다.

거실에 있던 LP장은 더이상 꽃을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좁은 골방에 LP는 쌓여가고 와이프의 잔소리도 쌓여가고 특단의 대책이라고는 정리밖에 없겠다 싶어 다른 동호인들의 노하우를 전수받았다. 덩구리목공에서 LP 랙을 처음 몇 개 주문한 뒤 이리저리 좁은 골방 공간에 쑤셔 넣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였고, 다시 쌓여갔다.

작은 공간이라도 생기면 무조건 쑤셔 넣었다. 그리스신화의 시시포스처럼 굴러온 바위를 겨우 올려놓으면 또 다른 LP 박스들이 내려와 또 어디다 치울지 궁리하며 살고 있다. 그래서 LP 한다고 얘기하지만, 집안 곳곳이 너저분하게 어질러져 있다. 조심스럽게 내린 결론은 더 큰 집으로 이사 가는 것이다. 그리고 더 큰방에 음악실을 만드는 것이다. 와이프 눈치 안 보고 마음껏 질러서 사방 벽면을 LP들로 가득 채우고 그 방에 콕 박혀 음악만 듣는 나만의 행복한 상상을 해본다.

Leave a Comment